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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밸런타인데이에 빨간 장미나 하트 주다 채찍을 맞는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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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서구 기독교 악습' 이슬람권선 처벌 강화 #'초콜릿 주며 여자가 고백'은 일본의 상술 #원래 서구에선 연인들끼리 선물 주고 받아 #안중근 의사 1910년 사형선고일 기억해야

파리의 연인들. 밸런타인데이는 이런 로맨틱한 느낌을 주는 날이다. Flickr@ Francoise fifich@t

파리의 연인들. 밸런타인데이는 이런 로맨틱한 느낌을 주는 날이다. Flickr@ Francoise fifich@t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밸런타인데이에 인기가 좋은 빨간 장미

밸런타인데이에 인기가 좋은 빨간 장미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는 한국에선 흔히 사랑을 표현하는 로맨틱한 날로 통합니다. 연인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살펴보면 문화권마다 소비하는 형식이 사뭇 다릅니다. 작은 상징으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 지역도 있고, 이날 이성에게 빨간 장미나 선물을 주려는 사람이 봉변을 당할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란에선 어머니와 부인에게 사랑 표현하는 대체 축일 권장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수많은 시민이 모여 왕정 타도를 외쳤던 아저디(자유) 타워. 이슬람혁명으로 이란인들은 왕정에서 해방됐으나 이슬람 신정체제가 들어서면서 여성 의상에서 제한을 받는 것은 물론 밸런타인데이를 비롯한 서구 유행의 도입도 금지 당하고 있다.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수많은 시민이 모여 왕정 타도를 외쳤던 아저디(자유) 타워. 이슬람혁명으로 이란인들은 왕정에서 해방됐으나 이슬람 신정체제가 들어서면서 여성 의상에서 제한을 받는 것은 물론 밸런타인데이를 비롯한 서구 유행의 도입도 금지 당하고 있다.

밸런타인데이는 모든 문화권에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이슬람권에서는 밸런타인데이를 기독교 세계의 풍습이라고 해서 배척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슬람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에선 밸런타인데이를 이슬람 문화에 반하는, 서구의 악습으로 여깁니다. 이란 당국은 2006년부터 2월 17일을 ‘세판더르마즈건(Sepandārmazgān)’이라는 축제일을 대신 쇠기를 강력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고대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시절부터 존재한 페르시아 고유의 축제인데요 ‘페르시아 사랑의 날’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인이 아닌 어머니와 부인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날입니다. 연인이 아닌 가족에게 사랑을 표현하라는 사회적인 압력입니다.

하지만 도도한 풍습을 뜯어고친다는 게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닌가 봅니다. 정부가 유도하는 대체 축제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이 싸늘했는지 다른 결의 대회가 이어졌습니다. 2011년 이란 인쇄산업소유주연맹은 밸런타인데이를 알리거나 선전하는 어떤 문구도 인쇄하지 않겠다고 결의했습니다. 밸런타인데이를 연상시킬 수 있는 하트나 반쪽 하트, 빨간 장미 모양을 포스터, 박스, 카드 등에 인쇄하지 않겠다는 선언도 함께 했습니다. 이를 어길 경우 처벌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도 했죠. ‘페르시아 사랑의 날’이 밸런타인데이에 밀리니까 이런 극단적인 조치가 나온 게 아닌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 여성 의상인 히잡. 머리를 가리는 용도다.

이슬람 여성 의상인 히잡. 머리를 가리는 용도다.

파키스탄, 장사와 종교 사이에서 갈등

국민의 96%가 무슬림인 파키스탄에서는 1990년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서구의 밸런타인데이 풍속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젊은 연인들끼리 빨간 장미와 선물, 그리고 카드를 교환하는 풍습이 광범위하게 퍼졌습니다.

일부 이슬람 정당이 이를 법으로 금지하려고 줄기차게 시도해왔습니다. 이슬람 단체나 정당원들이 이날을 맞아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합니다. 밸런타인데이를 핑계로 사랑 운운하다 불순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중세적인’ 이유에서입니다. 공개적으로 빨간 장미나 선물 상자를 들고 다니다 이런 시위대를 만나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밸런타인데이가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워낙 인기여서 쉽사리 금지 입법을 하지 못했습니다. 밸런타인데이 대목으로 짭짤한 이득을 보는 일부 상인들도 금지 조치에 반대해왔습니다. 꽃가게는 이날 엄청난 양의 빨간 장미를 팔 수 있고, 카드 제조업자들도 이날 매출이 짭짤해서 금지에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2016년부터 상황이 변했습니다. 2016년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가까운 페샤와르 지역 정부가 밸런타인데이를 쇠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2017년 2월에는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고등법원이 파키스탄의 공공장소에서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는 행동을 금지했습니다. 파키스탄 당국은 여기에 더해 최근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에 밸런타인데이와 관련한 프로그램이나 광고를 내보내지 말라는 지침까지 보냈다고 13일 자 일본 아사히신문이 이슬라마바드발로 보도했습니다.
그런데도 공공장소가 아닌 개인 상점에서 빨간 장미나 풍선 등 밸런타인데이와 관련한 물건을 팔거나 식당에서 밸런타인데이 특식을 내놓는 일은 완전히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여성 의상의 하나인 니캅.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리기 위한 용도다.

이슬람 여성 의상의 하나인 니캅. 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리기 위한 용도다.

말레이시아에선 감옥까지 보내며 전국적인 반(反) 밸런타인데이 캠페인

국가 차원에서 밸런타인데이에 제재를 가한 경우도 있습니다. 동남아권인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당국은 2005년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는 일을 악덕한 일로 간주하겠다는 포고를 내렸습니다. 말레이시아 최고 무슬림 성직자는 “밸런타인데이는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 무슬림은 다른 종교의 숭배 의식에 관계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까지 반포했습니다. 그러면서 ‘밸런타인데이의 덫을 조심하라’는 이름의 전국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호텔에 들어가 젊은 남녀를 쫓아내고 이슬람 대학가를 돌며 ‘밸런타인데이는 기독교의 종교의식이다’라고 적힌 전단을 나눠주는 등의 활동을 폈습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의 종교 당국은 2011년 밸런타인데이에 금지령을 어긴 무슬림 커플 100쌍 이상을 체포해 감옥에 보내는 등 강력하게 처벌했습니다.

이슬람 여성 의상 차도르. 얼굴을 제외하고 온몸을 가리는 것은 물론 몸매까지 드러나지 않게 하는 용도다.

이슬람 여성 의상 차도르. 얼굴을 제외하고 온몸을 가리는 것은 물론 몸매까지 드러나지 않게 하는 용도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선 밸런타인데이 기념하다 채찍 맞기도
수니파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주민을 단속하는 종교 경찰이 있습니다. 종교 경찰은 밸런타인데이가 기독교의 풍습이라며 밸런타인데이와 관련된 물품 판매를 금지했습니다. 2012년에는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하는 무슬림 140명 이상을 체포하고 꽃 가게에 들어가 빨간 꽃을 모두 몰수했습니다. 2014년에는 회사에서 여성들과 함께 이날을 기념하던 5명의 남자를 체포했고 형사 법정은 이들에게 징역형과 채찍형을 내렸습니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도 공공장소에서는 절대 이날과 관련한 활동을 하지 못 하게 했습니다. 이날 빨간 장미를 들고 다니다 종교 경찰에 잡히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하트가 그려진 커피.

하트가 그려진 커피.

밸런타인데이에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건 일본이 만든 풍습
한국에선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를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직장에서 동료에게 초콜릿을 전하며 정을 나누는 문화로 바뀌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초콜릿을 소비하게 하는 상술일 뿐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밸런타인데이에 ‘여자가 남자에게’ 고백하고 선물을 ‘초콜릿’에 국한하는 것은 일본의 영향과 상술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본에선 영어신문 ‘더 저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 1936년 2월 12일 자에 게재된 ‘당신의 밸런타인데이에는 초콜릿을 선물하세요’라는 광고를 기원으로 삼습니다. 밸런타인데이를 초콜릿과 연결한 첫 사례입니다. 효고 현(兵庫県) 고베시(神戸市)에 본사를 둔 모로조프 사(Morozoff Limited)의 광고입니다. 모로조프는 러시아 혁명 뒤 일본으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 표도르 드미트리예비치 모로조프가 1931년 고베에 창업한 레스토랑-카페-제과 업체죠. 지금도 일본 굴지의 회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첫 가게가 문을 열었던 한신미카게(阪神御影)역 광장은 2013년 ‘발렌타인 광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초콜릿

초콜릿

일본에선 그 뒤에도 이런 상술이 자주 눈에 띕니다. 1952년 초콜릿을 주력상품으로 설립된 제과업체인 메리 초콜릿(Mary Chocolate)이 1958년 도쿄 신주쿠(新宿)에 있는 이세탄(伊勢丹) 백화점 본점에서 ‘밸런타인데이 세일’을 하는 등 초콜릿을 밸런타인데이와 연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본 굴지의 제과업체인 모리나가(森永)도 1960년 무렵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선물하세요’라는 광고를 낸 데 이어 1965년 이세탄 백화점 본점에서 대규모 밸런타인 행사를 여는 등 관련 마케팅을 시도했습니다. 모리나가는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밸런타인데이를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면서 고백하는 날로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마케팅이 꾸준히 이뤄졌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이 경제발전에 따라 물질적으로 풍족해지고 고도소비사회로 전환하면서 ‘밸런타인데이=초콜릿’의 소비 공식이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콜릿 소비를 촉진하는 데 아주 뛰어난 마케팅 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일본 기업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유행시킨 풍속이 한국에까지 뿌리를 내린 셈입니다.

더구나 한국에선 더욱 한 달 뒤인 3월 14일을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인 화이트데이로 삼고 있는데요. 이것은 철저히 일본에서 만들어 퍼트린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화이트데이란 게 존재하는 나라가 한국과 일본, 대만뿐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하트 모양으로 만든 밸런타인데이 쿠키. Flickr@ Uschi

하트 모양으로 만든 밸런타인데이 쿠키. Flickr@ Uschi

2월 14일, 서양에서는 연인들의 날
하지만 밸런타인데이의 원조인 서구는 일본과 다릅니다. 서구에서 이날은 여자든, 남자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양한 사랑의 상징을 선물하는 로맨틱한 날입니다. 선물도 초콜릿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뭐든 마음을 표현하면 되는 것이죠. 빨간 장미가 인기가 있는 편이라고 합니다만.

밸런타인데이를 상징하는 빨간 장미. Flickr@ Louisa Burgess

밸런타인데이를 상징하는 빨간 장미. Flickr@ Louisa Burgess

밸런타인데이는 밸런타인 또는 발렌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대 기독교 성인의 축일에서 시작했습니다. 국가에서 결혼을 금지한 병사의 혼례를 집전했다가 처형당한 고대 로마 사제를 기리는 날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실제로 기독교 성인 중에는 그런 이름의 성인이 여럿 있습니다. 성 밸런타인데이는 성공회와 루터파 교회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7월 6일과 7월 30일을 밸런타인 성인 축일로 삼고 있죠.

아일랜드 더불린에 있는 성발렌타인상.

아일랜드 더불린에 있는 성발렌타인상.

기원은 18세기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월 14일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보내거나 달콤한 과자를 권하거나 인사 카드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런 풍습이 유럽과 북미로 퍼져나간 것이죠. 이런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날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성의 마음을 열기 위해 로맨틱한 상징을 선물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밸런타인데이의 상징은 하트 모양의 윤곽을 가진 물품이나 포장, 비둘기, 날개 달린 큐피드의 형상입니다. 원래 손으로 적은 카드를 보냈지만 19세기 이후 대량 생산된 공장제 카드가 나타나면서 자리를 내줬다고 합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밸런타인데이 카드. 연인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19세기 말 영국의 밸런타인데이 카드. 연인에게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일
결론적으로 밸런타인데이가 직장이나 학교 등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변질한 것은 일본의 상술 때문입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 외에 한국과 대만뿐입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 기념식이 지난해 10월 26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렸다. 이날 안 의사의 이름을 딴 대한민국 해군의 잠수함인 안중근함의 대표가 안중근 의사를 향해 거수경례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 기념식이 지난해 10월 26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렸다. 이날 안 의사의 이름을 딴 대한민국 해군의 잠수함인 안중근함의 대표가 안중근 의사를 향해 거수경례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게다가 1910년 2월 14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당시 일본의 조차지인 중국 랴오둥(遼東)반도 남단 뤼순(旅順)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날입니다. 안 의사는 법정에서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 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사형선고 100주년을 맞았던 2010년부터 국내에서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주고받을 것이 아니라 이런 안 의사를 기억하는 날로 삼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침략 야욕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면서도 두 나라가 더욱 친밀히 지내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자는 안 의사를 기억하는 일은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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