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동지 다음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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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동지 다음날’- 전동균(1962∼ )

누가 다녀갔는지, 이른 아침
눈 위에 찍혀 있는
낯선 발자국

길 잘못 든 날짐승 같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간 흔적 같기도 한

그 발자국은
뒷마당을 조심조심 가로질러 와
문 앞에서 한참 서성대다
어디론가 문득
사라졌다

2

어머니 떠나가신 뒤, 몇 해 동안
풋감 하나 열지 않는 감나무 위로
처음 보는 얼굴의 하늘이
지나가고 있다

죽음이
삶을 부르듯 낮고
고요하게

-어디 아픈 데는 없는가?
-밥은 굶지 않는가?
-아이들은 잘 크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은 뼈속 깊이 남는다. 손금처럼 새겨진다.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가 생전에 하시던 말씀을 언제 어느 곳에서나 다시 들을 수 있다. 어머니는 아들과 딸을 향해 아주 간소하게 안부를 묻는다. 왜 더 궁금한 게 없겠는가. 한참 뒤에야 우리는 이 짧은 토막의 문장이 얼마나 큰 사랑을 식솔로 거느리고 있는지를 알아차린다. 아들과 딸은 한 세대의 시간만큼 꼭 귀가 어둡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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