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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내셔널]'농사짓기' 교과서 보며 추억의 교실 여행

중앙일보

입력

"할아버지, 학교에서 농사짓기를 배웠어요?"
"그럼, 그때는 대부분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이어나가서 이 수업이 지금의 수학만큼이나 중요했어."

양호열 한국교육역사연구소 소장 #84년 고물상 리어카에서 옛 교과서 발견 #서점서 팔고 남은 교과서 보던 시절 떠올라 #대기업 그만두고 1500점 교육자료 수집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 미군정청시대 문교부가 발간한 농사짓기 교과서가 전시돼 있다. 백경서 기자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 미군정청시대 문교부가 발간한 농사짓기 교과서가 전시돼 있다. 백경서 기자

대구 동구 신천동 대백아울렛 8층 '추억의 거리 체험전'. 1910년 일제강점기부터 2001년까지 90여 년 동안의 교육자료 1000점이 한 자리에 전시됐다. 조선총독부 발행 교과서, 일제강점기 시험지와 통신표, 광복 후 최초의 한글 교과서 등이다. 이날 미군정청 시대(45년 9월~48년 8월)에 할아버지가 배웠던 교과서들을 어린 손자는 신기한 듯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손자와의 대화에 물꼬가 트였다.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 옛 대구 동성로 거리를 재현했다. 백경서 기자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 옛 대구 동성로 거리를 재현했다. 백경서 기자

김혜란(42·대구 달서구)씨는 "요즘에는 할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은데, 교과서 하나를 놓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좋다. 오길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칠판에 낙서를 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칠판에 낙서를 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529㎡(160평) 규모의 전시장에는 70년대 대구 시내인 동성로를 중심으로 이발소, 구멍가게 등 당시의 풍물 거리가 재현됐다. 7080 세대가 경험했던 학창시절의 낡은 나무 책상과 빛바랜 칠판이 있는 교실에서는 옛날 검정 교복과 교련복 등을 직접 입어 보고 촬영할 수 있는 체험코너도 마련됐다.

대구 대백아울렛에서는 오는 18일까지 추억의 거리 체험전을 진행한다. 백경서 기자

대구 대백아울렛에서는 오는 18일까지 추억의 거리 체험전을 진행한다. 백경서 기자

전시장 한편에서 아이들은 옛날 과자 뽑게 놀이를 했다. 어른들은 68년 6월 14일 도랑에서 가재를 잡았다는 일기를 보면서 추억에 잠겼다. 스피커에서는 86년 MBC 강변가요제 대상을 받은 곡 '젊음의 노트'(유미리)가 흘러나왔다.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 68년 6월 14일 일기. 백경서 기자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 68년 6월 14일 일기. 백경서 기자

오는 18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회는 모두 한국교육역사연구소 소장이자 고문헌 수집가 양호열(60)씨가 30여 년 동안 소중하게 모아온 자료들로 꾸려졌다. 양 소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대구에서 서점을 운영하셨는데 팔고 남은 교과서로 공부하거나 오래된 교과서들을 보곤 했다. 84년에 안동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우연히 고물상 리어카에서 일제 강점기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과서였던 조선어독본을 발견했는데 어린 시절 교과서를 보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교육자료를 수집하는 데 열중했다"고 말했다.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에 그동안 모은 1000점의 교육자료를 전시한 양호열 한국교육역사연구소장. 백경서 기자

대백아울렛 '추억의 거리' 체험전에 그동안 모은 1000점의 교육자료를 전시한 양호열 한국교육역사연구소장. 백경서 기자

양 소장은 30년이 넘게 전국의 댐수몰지역을 돌아다녔다. 근처 소각장에서 버려진 교과서들이나 교복, 졸업앨범부터 일제강점기 때 어린이 교육용으로 쓰이던 동요 음반 등을 주웠다. 옛 교사들을 찾아가 교사들의 교육 일지 등도 모았다. 양 소장이 모은 총 1500여 점의 자료는 115㎡ 두 개의 창고에 보관 중이다. 썩어서 버리는 자료가 많아지자 사비로 마련한 창고다. 습도를 조절하고 온도를 25도 이하로 유지하면서 자료 보관에 각별히 신경 쓴다. 양 소장은 "시대나 그 당시의 교육관에 따라 교과서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교육의 역사가 곧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생각했다. 지금 자료를 모으지 않으면 우리 역사가 점점 사라질 것 같았다"며 열심히 자료를 모으고 보관해온 이유를 설명했다.

양호열 고문헌 수집가가 마련한 창고에는 1500점의 교육 자료가 있다. [사진 한국교육역사연구소]

양호열 고문헌 수집가가 마련한 창고에는 1500점의 교육 자료가 있다. [사진 한국교육역사연구소]

이날 전시회장에서는 일제강점기 시대 자료들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국사책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가 아닌 일본역사를 가르치는 교과서다. 보통학교의 조선어 독본은 한글을 조선어라는 소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제1차 조선교육령(1911년 8월)에 따라 '국어'과목이 '조선어'로, '일본어'과목이 '국어'로 변경됐던 당시 교육 현실이 드러나 있다. 양 소장은 "95년 대구에서 첫 전시 이후 서울, 일산 킨텍스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열고 있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이 자료들을 통해 아름다운 기억과 소중한 추억들을 다시 만나보고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구=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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