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IMF 세대’ 무력감 동료 감수성으로 위트 있게 표출 … ‘청년=미래’ 해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69호 26면

[CRITICISM] 80년대생 절망감 소설화한 김애란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 겨우 내가 되겠지” 이 문장만큼 미래 없는 세대의 절망감을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은 없다. 말줄임표와 ‘겨우’라는 부사가 감추고 있는 뼈아픔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 세대적인 절망감을 이해하기 힘들다. 김애란의 소설 ‘서른’(소설집 『비행운』 수록)에서 보습학원의 강사인 주인공은 학생들을 보며 느꼈던 안쓰러움을 그렇게 고백한다. ‘내’가 겪은 세상과 아래 세대가 직면할 세상이 다르지 않고, 그들도 ‘나’처럼 살게 되리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아픈 일이다. 어른이 되어 사회에 진입한다는 것이 채무자에서 “더 나쁜 채무자”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주인공은 남자친구가 소개한 비인간적인 다단계 판매집단에 묶이게 되고, 결국 자신을 따르던 제자마저 끌어들인다. 그 제자가 인간관계의 파탄으로 자살을 기도해서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이 ‘서른’의 죄의식을 편지의 형식으로 담담하게 ‘언니’에게 고백한다.

2000년대 이후 사회 현실 재현 #불행을 농담과 희극으로 묘사 #소설 주인공들 태도·언어에 공감 #최근작 『바깥은 여름』서 변화 감지 #‘세대의 아이콘’서 ‘시대의 징후’로 #“우린 갈 곳이 없다, 상중이었다 … ” #용산참사·세월호 떠올리게 해 #상실 이후 남겨진 이들 얘기 주목

2000년대 이후 김애란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한국문학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작가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김애란 세대’의 무력감이 소설적 표현을 얻게 되는 사건이었다. 1980년생인 김애란이 대학생 시절이었던 2002년 등단했을 때 이른바 ‘IMF 세대’는 자기 세대의 절망감을 자기 세대의 감수성으로 소설화할 수 있는 섬세한 동료를 얻게 되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젊음이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 청년은 더 이상 ‘미래’를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사회학자 전상진은 『세대게임』에서 청년의 가치가 하락하고, ‘청년=미래’의 등식이 해체된 것으로 이 사태를 규정한다. 한국의 고용 불안과 높은 주거비용은 청년들에게 ‘청춘’을 빼앗아 ‘청년성을 상실한 청년’으로 만들었다.

김애란의 등단작인 ‘노크하지 않는 집’과 소설집 『침이 고인다』에서 청춘들의 임시적 거처인 ‘방’의 문제가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청춘들의 ‘방’은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상황 속에서 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처절한 ‘입사식’을 치르는 공간이다. 이들이 머무르는 ‘노량진’과 같은 지명들은, 취업 준비생, 아르바이트생, 비정규직 강사 등의 신분을 가진 젊은이들이 제도권 사회로의 진입을 힘들게 준비하는 공간이다. 그들은 ‘계급’조차 갖지 못한 세대이며, 그들의 ‘입사식’은 계속 지연된다.

하지만 김애란 문학이 시대적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는 그 점에서만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출세작인 『달려라 아비』가 독자들의 지지를 받게 된 미학적 계기는 불우한 상황을 대하는 주인공들의 태도와 언어의 문제였다. 주인공은 자신을 사생아로 만든 아버지의 무책임에 대해 저주와 원망을 보내기보다는 아버지를 희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우를 받아들인다. 비애를 짐짓 명랑하고 위트 있게 표현하는 방식이야말로 김애란 초기 문학의 강력한 무기였다. 인물들의 보여주는 투명한 체념의 미학과 지독한 불행을 농담으로 만드는 위트 있는 문장들은, 불행의 원인을 타자에게 돌리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인 자립성을 유지하는 삶의 태도를 암시한다.

2017년의 문학을 결산하는 한 매체에서 작가 50명이 선정한 ‘올해의 소설’에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사진)이 선정되었을 때, 그것은 그리 신선한 것은 아니었다. 김애란은 문학제도와 문학시장 모두에서 폭넓은 지지자를 가진 극소수의 작가이며, 그 세대에게는 거의 유일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지점은 김애란의 소설 내부의 변화이다.

돌이켜보면 『비행운』에 수록된 ‘물속 골리앗’은 이후 김애란 소설의 진로를 예견하게 했다.  이 소설의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참담하다. 재건축에 따른 철거에 저항하다 타워크레인에서 아버지가 사망하고 뒤이은 엄청난 홍수가 낡은 집을 덮친다. 병든 어머니마저 돌아가고 그 시신을 보존하는 것조차 어려워 홍수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 소년의 상황 속에 위트와 유머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강산아파트는 지금 서서히 허물어뜨리며 자살하고 있다는 걸.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갈 곳이 없었다. 우리는 상중(喪中)이었다.”는 이 시대적 상황을 요약하고 있다. “나는 다시 기다려야 했다”와 “누군가는 올 거야”라는 문장 사이에서 이 소설은 완성된다. 큰물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부모에 대한 장례를 치르지 못한 ‘나’의 마지막 애도의 자세는 기다림일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용산 참사’의 이미지가 어른거리는 이 소설의 세계는 『바깥은 여름』에 오면 더 깊은 애도의 형식과 만난다. 이제 김애란은 한 세대의 아이콘이 아니라, 한 시대의 징후가 되기에 충분했다.

상실 이후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소설집의 분위기를 ‘입동’이라는 단편은 압축한다. 간신히 내 집 장만에 성공한 젊은 부부가 후진하던 어린이집 차량에 외아들을 잃은 일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다. 소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남은 자들이 그 불행의 흔적을 감당하는 시간과 방식이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전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불행을 공유한 부부 사이라도 마찬가지다. “화장터에서 어린 아들을 보내며 아내는 ‘잘 가’라 않고 ‘잘 자’라고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양손으로 사진을 매만지며 그랬다.”와 같은 부분에서 ‘잘 자’와 ‘잘 가’의 내면적 뉘앙스의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와 같은 타인의 시선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 놓은 국화”처럼 끔찍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라는 아내의 절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고 부주의했는가를 고통스럽게 환기시킨다.

부부가 미루어온 새집의 도배를 한다는 것은 다른 시간을 맞이하기 위한 자세일 것이다.  도배란 시간의 얼룩을 덮는 방식으로 다른 일상을 꿈꾸는 행위이다. 도배를 하고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던 아이의 보험금을 빚 갚는 데 쓰기로 마음먹는 것은 살아남은 자가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기본 명령에 응답하는 길이었다. 사고를 낸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복분자 액이 벽에 튄 얼룩은 그렇다고 해도, 아이가 자기 이름을 쓰다 만 흔적을 벽에서 발견했을 때, 도배는 끝내 완성될 수 없다. 남편은 “그 순간에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도배를 완성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곤혹은 애도 이후의 시간에 대한 섬세한 은유가 된다.

소설 ‘입동’이 ‘세월호’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가능한 얘기지만, 세월호의 그늘은 거의 모든 문학에 드리워져 있다. 한국문학은 여전히 ‘상중(喪中)’이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상실한 대상에 대한 리비도를 철회해가는 애도 작업의 실패가 우울증을 가져온다고 했다. 정상적인 애도 과정은 상실한 대상에 대한 애착과 열정을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을 향한 열정이 다른 대상을 향해 오롯이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정상적인 애도 작업이란 항상 불충분하며,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문이 뒤따라온다. 애도의 실패가 역설적으로 진정한 애도의 과정이라면, 애도는 멈출 수 없다. 프랑스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애도일기』에서 애도를 일종의 ‘대기 상태’라고 했다. ‘도배’를 끝내 완성하지 못하는 저 부부처럼, 살아남은 자들은 무언가가 돌아오고 다시 시작되기까지, 기다리며 대기해야만 한다.

청년의 절망 압축한 “너는 자라 … 겨우 내가 되겠지”

학생 중에는 평소에 저랑 한마디도 안 하다 이따금 딸기 우유나 초콜릿을 건네고 가는 여중생도, 말 수 적고 속이 깊어 언제나 부모님을 걱정하는 남고생도 있었어요. 공부를 하도 한 탓에 수업 중에 코피를 쏟는 아이도, 갑자기 복도로 뛰어나가 토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요.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 겨우 내가 되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요? 저도 그걸 잘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느 날 눈 뜨고 보니 제가 다른 사람이 돼 있더라고요. 이전에는 채무자. 지금도 채무자. 예나 지금이나 빚을 진 사람이라는 건 똑같은데. 좀 더 나쁜 채무자가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요. 언니, 저는 언니와 헤어진 뒤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학창시절을 아슬아슬하게 마쳤어요. - 김애란 소설 ‘서른’(소설집 『비행운』 수록)중에서 인용

이광호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학평론가. 고려대에서 박사(국문학)학위를 받았고 소천비평문학상·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비평집으로 『익명의 사랑』과 산문집 『지나치게 산문적인거리』, 연구서 『시선의 문학사』 등의 저서가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