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벤져스’라고 들어보셨는지. 수목드라마 1위를 달리고 있는 SBS ‘리턴’에 등장하는 악인 4인방을 지칭하는 말이다. 상장기업 대표 역할의 신성록을 비롯, 굴지의 그룹 본부장 박기용, 외과의사 윤종훈, 신학대 교수 봉태규의 악행이 어벤져스급이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극 중 이들의 부모가 재계, 의료계, 사학재단 등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무소불위의 권력 집단인 것은 물론이다. 그렇지 않다면 제아무리 금수저라도 태연하게 살인을 모의하고, 시신을 유기하며, 은폐를 도모하고자 마음먹기조차 쉽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악벤져스' 4인방 중 사학재단 2세 역 #말보다 주먹, 시청자 공분 사며 #10년만에 미니시리즈 화려한 복귀
발단은 극 중 어린 시절부터 붙어 다니던 한은정이 도로 한복판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면서 이들 모두가 살인사건 용의 선상에 오른 것이었다. 서로 죽고 못 사는 죽마고우처럼 굴던 이들은 정작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되자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물론 무고한 친구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도 불사하지 않는다. 이들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죽어 나간다.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만 아니면 돼”라는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봉태규(37)가 맡은 김학범 역할이다. 같은 나쁜 짓을 해도 신성록이 머리를 써가며 한다면 봉태규는 막가파다. 기분이 나빠지면 다짜고짜 주먹부터 나간다.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비키니만 입고 있는 여자를 향해 맥주병을 내리치기도 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 머리를 돌로 찍기도 한다. 생각 따위는 행동 다음에 잠깐 할까 말까 정도? 이내 실실 웃으며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해리성 인격 장애가 따로 없다.
봉태규가 새삼 다시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안하무인에 무데뽀 막무가내 정신으로 무장해 막 나가는 모습을 보면 사람의 탈을 쓰고 어쩜 그럴 수 있나 싶다가도 한순간에 180도 달라져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 섬뜩하다 못해 오싹하다. 한데 그 단순무식함과 순진함이 그에게 묘한 방패를 쥐여준다. “그래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면밀함을 보이는 신성록에게 시청자의 분노가 옮겨가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는것이다. 2000년 데뷔작 ‘눈물’로 봉태규를 발굴한 임상수 감독이 했던 “재미있는 캐릭터를 천박하지 않게 연기한다”는 평처럼 ‘천박한 캐릭터를 밉지 않게 연기한다’는 역설을 가능케 하는 셈이다.
사실 봉태규는 데뷔하면서부터 충무로의 기대주였다. 류승범과 같은 해 데뷔해 ‘품행제로’(2002) 등에서 불안한 청춘을 상징하는 얼굴로 떠오르면서 여기저기 러브콜을 받았다. 시트콤 ‘논스톱4’(2004)에서 보여준 코믹 연기는 영화 ‘두 얼굴의 여친’(2007)와 드라마 ‘워킹맘’(2008) 등을 거치며 물이 올랐고, ‘바람난 가족’(2003) ‘가족의 탄생’(2006) 등에서 선보인 생활밀착형 연기 또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변강쇠로 열연한 ‘가루지기’(2008) 실패 이후 소속사와 소송, 아버지의 사고사, 허리 수술 등이 이어지면서 의도치 않은 공백이 길어진 셈이다. 그동안 ‘살림남’ 등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간간이 얼굴을 비치긴 했지만, 미니시리즈로 시청자들과 만나기까지는 꼬박 10년이 걸렸다.
한데 놀랍게도 그는 “불필요하게 열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난해 연극 ‘보도지침’을 하면서 “캐릭터의 삶을 해석하고 파악하려 애쓸수록 캐릭터를 가두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리턴’은 그 믿음을 실천하기에 더없이 좋은 판이다. 그가 지난 10년간 겪어온 변화, 이를테면 사진가 하시시박과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며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나 글을 쓰고 책을 쓰며 발견하게 된 자아를 단면으로 쪼개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자타공인 패셔니스타다. 하여 쫙빼 입은 수트 차림의 재벌들과 달리 그는 과감한 컬러 사용과 믹스 앤 매치로 강남 금수저를 표현한다. 평소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꾸준히 표현해온 패션에 대한 관심이 캐릭터를 더욱 실감 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산이 된 셈이다. 제작발표회에서 “처음에는 대본을 보고 거절하려 했지만 감독님과 두 번째 미팅 이후 학범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됐고, 캐릭터를 얼마나 풍성하고 매력적으로 표현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는 그의 말은 이러한 자신감에서 연유한 게 아니었을까. 첫 작품부터 주연으로 나서면서 9년을 내리 비워내고 다시 그 시간만큼 채워 넣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같은.
드라마 '리턴'은 극 중 변호사 역할을 맡은 고현정, 강력계 형사로 분한 이진욱과 악벤져스 4인방의 대결 구도가 심화하면서 더 많은 인물이 새롭게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만 봐도 주인공 오른편에 있는 4인방은 캐릭터를 확실히 각인시켰지만, 왼편에 있는 6명의 정체는 아직 하나씩 밝혀지는 중이다. 펜트하우스 아래층에 거주하는 의사 오대환이나 룸살롱을 운영하는 전직 형사 손종학은 이제 막 등장했으니 회마다 뒤집히는 반전의 방향이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제는 모두가 팽팽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13명 중 한 명이라도 끈을 놓치면 느슨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만약 고현정의 느린 말투와 어색한 발성이 반전을 위한 포석이 아니라면 조연들은 살아서 펄떡이는데 주연이 되려 몰입을 방해하는, 연기파 배우 인생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부디 4인방의 전사도 충분히 설명되길 바란다. 그래야 봉태규의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을뿐더러 오랜만에 악역에 빠져든 보람이 있을 테니까.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