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도 못 허문 불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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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내성적인데다 남달리 책임감이 강해 학생들의 무리한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겁니다.』『이학장님의 죽음은 우리 나라 대학교육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읍니다.』
19일 새벽, 건국대 농대 학장실에 마련된 이경희학장의 빈소에는 부인 김원희씨(59)등 가족과 동료교수·제자 등 30여명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슬픔에 젖어있었다.
『자살하기 하루전인 17일 동료 농대교수 6명과 함께 총장실에서 농성중인 학생들을 찾아가 해산을 종용했으나 학생들이 총장실 출입문에 「교수·교직원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써 붙이고 「학장과는 만날 필요가 없다」며 대화를 거부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이학장은 오후7시부터 8시까지 1시간동안 총장실 앞 복도에서 서성거렸으나 끝내 학생들을 설득하지 못한 채 이날 밤 혼자 연구실로 돌아가 목숨을 끊었다.
이학장은 동료교수와 가족들에게 『역량 부족으로 사태를 해결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내용의 유서 5통을 남겼으나 학생들에게는 『슬기롭게 대처해 주었더라면 참으로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표시했을 뿐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이학장이 자살한 뒤 18일 오전11시 학교측은 『15억원의 예산을 들여 올5월까지 실습농장을 마련, 내년엔 실습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학생들은 이학장의 죽음과 실습농장 확보문제는 별개의 것이라며 『올봄에 농사를 짓고 졸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 총장실에서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이학장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끝까지 우리의 요구를 관철해야 한다」는 것이 학생들의 명분.
죽음을 통해 제자들에게 호소하는 스승의 보기 드문 살신성인정신도 외면할 만큼 사제관계는 메말랐는가.
이학장의 비장한 결심은 별다른 의미가 없게 됐다. 스승과 제자사이에 놓인 불신의 벽은 스승의 죽음으로도 허물 수 없는 것인가. <길진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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