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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둥~ 둥 12현 소리에 건 청춘 … 창작 국악 새 길 연 거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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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가야금 명기 10대를 자택에 놓고 함께 생활했던 황병기 명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야금 명기 10대를 자택에 놓고 함께 생활했던 황병기 명인.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31일 별세했다. 82세. 지난해 말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회복하지 못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 별세 #고교 교복 입고 서울법대 다닌 괴짜 #전통가락에 현대음악·재즈 옷 입혀 #백남준·홍신자·장한나 등과 협업도

사람들은 괴짜라고 했지만 사실은 가장 단순한 길을 선택한 삶이었다. 황 선생은 생전에 “사람들은 나더러 왜 수염을 길렀다 깎았다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저 여름엔 더워서 깎고 겨울엔 추워서 기를 뿐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독특한 이력으로 국악계에 들어서 거장이 되기까지, 남달라 보이는 그의 인생 또한 사실은 간단한 선택들로 엮어졌다.

고인은 경기중·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59년 서울대 국악과 강사로 시작해 이화여대 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다. 호암상·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고 ‘침향무’ ‘미궁’ 등을 작곡하며 국악에 창작음악이라는 개념을 심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무용가 홍신자, 첼리스트 장한나, 대중음악가 백현진, 발레리나 김지영 등과 작품을 함께 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2012년 국립발레단 무용수 김지영씨(오른쪽)와 공연한 장면. [중앙포토]

2012년 국립발레단 무용수 김지영씨(오른쪽)와 공연한 장면. [중앙포토]

가야금을 시작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51년 전쟁 중에 부산으로 내려갔던 경기중 재학 시절 친구 손에 이끌려 허름한 교습소에서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들었다. “가야금은 삼국시대 이후 사라진 악기인 줄만 알았다”던 황 선생은 “둥둥 뜨는 소리를 듣고 ‘이건 꼭 배워야겠구나’ 결심했다”고 했다. 이후 부산에 피란을 와 있던 국립국악원을 매일 드나들며 국악원 악사이던 김영윤 선생에게 궁중음악인 정악으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윤덕 선생을 만나며 민속음악인 산조까지 범위를 넓혔다.

54년 고교 재학 중에 전국 국악 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한 것이 공식 데뷔다. 수상을 계기로 고교 졸업 때 특기상을 받았지만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뒤 졸업장 좀 찾아가라고 연락이 와서 그때 알았다”고 했다. 대학 때도 고등학교 교복이 편해 그걸 입고 역시 편하다는 이유로 짚신을 신고 다녔다. 한쪽에는 가야금을 끼고 다니던 그의 별명은 ‘영감’이었다. 고인은 57년 KBS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1위를 하면서 주목받는 신인으로 올라섰다. 2년 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당시 서울대 음대 학장이었던 현제명 선생이 국악과 강사로 부른 것도 이 수상 경력 덕분이었다.

62년 ‘국화 옆에서’가 첫 창작곡이다. 미당 서정주의 시에 붙인 노래와 거문고·대금·장구가 함께 하는 음악이다. 유럽 순회 연주를 위해 불상이 춤추며 움직이는 모습을 그린 ‘침향무’도 대표작이다. 하지만 75년작 ‘미궁’은 그를 좀 더 대중적인 작곡가로 만들었다. 무용가 홍신자와 초연한 ‘미궁’은 인간이 울고 웃는 원초적인 소리, 신문 기사 낭독, 그리고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바닷물과 같은 가야금 소리로 이뤄진 작품이다. 현대적이고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괴담이 떠돌 정도로 화제가 됐다.

대학 재학 시절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 [중앙포토]

대학 재학 시절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 [중앙포토]

연주만 하던 황 선생이 작곡을 시작한 것은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스트라빈스키의 현대음악, 백남준의 전위예술, 존 콜트레인의 재즈에 충격을 받아 작품과 장르를 파고들어 연구했다. 고인은 생전에 “서양 현대음악은 내 곡들에 녹아있는 영감의 원천이고, 재즈와 국악의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나의 행복이었다”고 했다.

고인은 개량 악기를 써본 적이 없었지만 새로운 시도에는 유연했다. 2007년 ‘황병기의 제자’라는 타이틀로 데뷔하며 전자 음향을 쓴 가야금 그룹을 "본질만 잊지 않으면 된다”며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젊은 노래와 가수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지난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수 싸이와 노라조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09년 고인이 연출한 ‘뛰다, 튀다, 타다’ 공연에 노라조를 게스트로 참여시켜 가요 ‘슈퍼맨’과 국악의 성공적인 콜라보 무대를 선보였다.

99년엔 대장암 수술 후 ‘시계탑’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서울대병원의 입원실 창문으로 보이던 시계탑을 떠올리며 어둠과 빛의 교대를 그린 작품이다. 고인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처지의 나를 덮쳤던 생명의 환상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오동 천년, 탄금 60년』, 2009) 당시에 그는 빠른 속도로 회복해 퇴원하자마자 독주회를 하고 독일 하노버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난해 9월 16년 만에 발표한 새로운 가곡 ‘광화문’이 마지막 작품이 됐다.

31일 빈소에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백병동 서울대학교 작곡과 명예교수, 배우 박정자 등이 고인을 추모했다. 백병동 교수는 “늘 새로움을 찾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던 동료”라고 했다. 박정자는 “나는 반발짝 떨어져서 늘 바라만 보던 입장이었지만 계시다는 것만으로 힘이되는 선배 예술가였다”고 말했다. 고인의 제자인 지애리 가야금 연주자는 “책을 쓰고 싶어서 도표 그리는 법을 물어보셨을 정도로 새로운 계획이 많으셨는데 갑작스럽게 가셨다”고 아쉬워했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소설가 한말숙씨, 아들 준묵·원묵씨, 딸 혜경·수경씨가 있다. 고인이 “간섭을 최대한 안 하고 지켜만 보며 키웠다”고 했던 큰아들은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둘째 아들은 미국 텍사스 A&M 대학의 생명공학과 교수다. 딸 수경씨는 동국대 강사로 활동 중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30호. 장지는 경기도 용인천주교묘원이며 발인은 2일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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