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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 빼는 레이저로 수천 년 더께 없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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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문화재 복원도 과학이다. 단순한 손재주나 고고학 지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파손된 문화재를 복원하려면 X선 분석기.전자현미경.3차원 레이저 스캐너가 필수품이다. 요즘엔 DNA 분석기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떨어진 도자기 조각을 꿰맞추거나, 접힌 그림을 바로 펴는 건 기본 중 기본. 고문서에서 발견된 벌레의 피를 추출해 옛 사람들의 혈액형을 알아내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영화 '주라기 공원'과 다를 바 없다.

●국내 문화재 복원 기술도 크게 발전했다. 올해에는 그 역량을 집약할 문화재종합병원 공사가 시작된다. 보존 관련 연구개발비도 대폭 증액됐다. 또 요즘에는 디지털 가상 복원도 인기다. 첨단과학이 숨쉬는 문화재 보존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1 자연과학·공학 총동원

10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석조보존실. 지난해 4월 화재로 녹아내린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의 잔해가 보인다. 불이 나기 전 만들어둔 탁본과 성분 분석 결과를 토대로 복제품을 만들어 낙산사에 다시 안치했으나 한번 망가진 문화재를 복원하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보존실에는 망치.드라이버 등 기본도구부터 1억4000만원 나가는 레이저 클리닝기 등 첨단장비까지 갖춰져 있다. 레이저 클리닝기는 피부과 병원에서 검은 반점을 뺄 때 쓰는 기계. 오랜 세월 석조물에 달라붙은 오염물질을 세척.제거하는 데 사용된다. 최근 북관대첩비를 일본에서 반환받았을 때 '위력'을 발휘했다. 비석 상부에 흘러내린 시멘트 오염물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비문 사이에 박힌 시멘트 흔적은 치과용 소도구로 긁어냈다. 탁본이 불가능할 정도로 방치됐던 대첩비가 제모습을 찾게 됐다.

석조보존실에는 다섯 명이 근무한다. 전공도 화학.조각.미술사 등 다양하다. 문화재 보존.복원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악수'가 필수적이다. 과학을 담당하는 곳은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 화학.생물학부터 유전공학.환경공학까지 석.박사급 연구원 24명이 일하고 있다. 흰 가운을 입고 조심조심 유물을 다루는 모습이 마치 종합병원 수술실 같다.

#2 3중 보안 '보존과학실'

14일 오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세 번의 보안장치를 통과해 들어갔다. 400여 평의 널찍한 공간이 총 25개의 방으로 나눠졌다. 금속.목재.토기.서화 등 재질별로 구분됐다. 박물관 소장 문화재 20만여 점 중 '낡고 병든' 것을 '튼튼하고 팔팔하게' 부활시키는 곳이다. 지난해 10월 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보존과학실도 규모.시설 모두 업그레이드됐다. 방마다 가스분석기.비파괴 성분 분석기.동결건조기.대형훈증기 등 첨단장비가 구비됐다.

우선 금속실을 들여다봤다. 5월 열릴 경주 호우총 특별전에 선보일 유물 손질이 한창이다. 호우총은 1946년 해방 후 우리 고고학자들의 힘으로 처음 발굴한 무덤이다.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교류를 보여주는 문화재가 대거 출토됐다. 박학수 연구원이 특별전에 내놓기 위해 60년 전 발굴 당시 수습한 청동항아리 조각을 맞추고 있다. X선 검사로 조각들의 균열.부식 여부를 알아내고, 특수접착제로 하나하나 붙여나가야 한다. 자기실도 호우총 특별전을 준비 중이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 토기항아리가 보였다. 오래전에 복원을 시도했으나 기술 부족으로 중단했던 것들이다. 황현성 연구원은 "색상을 맞추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자기에 비해 토기는 그나마 작업이 수월한 편"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중앙박물관에서 보존 처리하는 유물은 연평균 1000여 점에 이른다.

#3 인분 분석 … 식생활도 복원

최근 문화재 보존은 토양 분석, 인골(人骨) 분석까지 확대됐다. 유물의 단순복원 차원을 넘어 옛 사람들의 생활상까지 알아보는 단계로 발전했다. 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지의 토양을 분석, 고대 화장실 유물을 확인했다. 흙에서 고등동물의 배설물에만 있는 코프로스타놀이라는 물질을 찾아낸 것. 해당 유물은 그전까지 곡물.씨앗을 담아놓는 저장창고로 여겨졌다.

문화재연구소 정용재 학예사는 "고도 경주에서 화장실 유적 하나 찾아내지 못한 건 그간 유적지 주변의 흙을 문화재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인분에 들어있는 물질.기생충을 분석해 과거의 식생활을 복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배설물도 문화재로 인정받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인골.치아.모발 등의 DNA 분석도 활발하다. 관련 분석을 통해 인골의 혈연관계는 물론 과거의 기후.식생.생활상 등을 추출해낼 수 있다. 생명과학(BT)와 고고학의 행복한 결합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올해 10억원을 들여 몽골의 유골 1000여 구를 분석, 한민족의 기원을 추적한다. 서민석 학예사는 "한민족의 이동경로가 밝혀지면 고구려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논리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 정책이 보존.복원에서 예방.연구로 무게중심을 옮긴 것도 최근의 특징. 올해 과학기술부에서 연구.개발비(R&D) 44억원을 따냈다. 보수재료 개발, 재해예방 시스템 구축, 전통 제작기술 표준화 등이 추진된다.

문화재연구소 김용한 보존과학실장은 "문화재는 케케묵은 유물이 아니라 첨단과학의 결집체"라며 "올해는 기후.해충 등에 위협받는 각종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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