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이 멎어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8년 반 동안 미·소·중공간에 가장 큰 지역문제로 강대국 관계를 흠가게 했던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14일 소련군 철수에 관한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외형적 해결의 전기를 맞았다.
이 협정은 소련군의 철수가 곧 내전의 종식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이를 환영한다.
첫째는 미국이 월남전에서 체험했듯이, 강대국들의 주변 약소국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무력침략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노골적 제국주의시대는 끝장났다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된 점이다.
월남전의 체험에서와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에서도 강대국군대의 철수는 그들이 갑자기 도덕성을 회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외국 파병에서 오는 출혈을 자국국민들이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된 변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국내로부터의 자제요인은 모든 강대국의 모험주의를 억제하는 가장 확실한 담보라고 생각되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그런 내부로부터의 개입기피성향이 하나의 추세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아프가니스탄의 철군으로 한반도 주변에서도 세력싸움을 하고 있는 3강대국들 사이에 평화공존 분위기를 방해해 온 또 하나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는 점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중공이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에 앞서 풀어야 할 3대 장애요소 중의 하나였던 점에 비추어 이번 협정은 중소간 긴장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남북한간의 긴장완화와 궁극적인 통일은 물론 남북한 당사자간의 접근에서 실마리가 풀어질 성격의 것이지만 미·소·중공의 평화공존이 필수적 조건인 이상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이점에서도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평가는 강대국관계에 국한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내부문제에 대한 전망은 불행히도 밝은 것이 못된다. 첫째 이번 협정에는 휴전에 대한 언급이 없고 미소가 각각 후견세력에 제공해 온 무기공급을 중단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쟁을 주도해 온 소련군이 약속대로 내년 2월까지 전면 철수할 경우 그들이 지탱해 온 카불정권은 약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붕괴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에는 힘의 공백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메울 수 있는 통일된 국내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는 상태다.
이 때문에 소련군의 철수는 평화로 곧바로 이어질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다. 지금까지 내전을 계속해 온 17개의 정부군 및 게릴라단체들은 앞으로도 미국·소련 및 이란의 무기공급을 계속 받으며 힘의 공백을 독차지하기 위한 무력투쟁을 계속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국내 상황 때문에 모처럼 이루어진 미소간의 철군합의는 그것이 유혈의 희생자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이익을 도외시한강대국간의 이기적 흥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소적 평가를 받을 소지가 많다.
아프가니스탄내전을 진실로「국제평화협정」이란 미-소간 합의문서의 공식명칭에 걸 맞는 방향으로 매듭짓기 위해 두 강대국은 휴전과 무기공급중단을 위한 협상을 계속 성실히 진행시켜 총성이 멎게 되기를 우리는 촉구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