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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1월 수상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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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장원>

노루발 
-박한규

희떱게 헤진 남루 곱솔로 깁는 자리
뒤꿈치 세워가며 시접 꺾어 넣는 길
발아래 그리움 묻고 박음질을 합니다

구겨진 상처들이 더 깊고 섧다는 걸
솔기 풀린 기억 속 고개든 아픔들을
지그시 내리 누르고 뒤로 밀며 갑니다

헐거운 관절들이 속 깊이 저미어도
쉼 없이 겅중겅중 보듬고 조이라며
세월 밖 오려두었던 꿈 조각을 덧댑니다

◆박한규

박한규

박한규

1960년 충북 제천 출생. 현대제철 포항공장 근무. 중앙시조백일장 신문지면으로 시조 독학.

<차상>

달항아리 낳기   
-류용곤

앙상한 뼈마디로 붉게 타는 숯덩이들
각혈하듯 토해 뱉은 막바지 불꽃 연기
애태워 숨 가쁜 호흡 목숨 가둬 누운 도공

백옥을 품고 자는 진흙 위의 굴뚝 탑이
타 올라 숨 돋우며
불을 적신 일호령(一號令)
활 활 활 속을 태우듯 먹 가슴이 달아 온다

토굴 문 어둠 깨며 징을 치고 달을 낳듯
새벽빛 여물어낸
연기 오른 가마 로에
꽃 다식 아름진 문양 윤빛 익은 달항아리

더디게 멈춘 걸음 아린 눈물 젖은 눈썹!
바람자락 그 제사
가둘 곳에 재워두고
춘양목 장작의 불속 자궁 문을 열고 있다

<차하>

이효석 문학관     
-이인환

새하얀 영혼 스민 향기가 머무는 곳
한가위 이틀 앞둔 연휴에 감동 안고
그 옛날 메밀꽃 추억 가던 발길 멈춘다

새롭게 단장한 집 국화 핀 뜨락에선
떠나간 짧은 생애 못다 한 그리움이
애절한 선율로 남아 물결처럼 흐른다

열정에 향 뿌린 듯 설렘의 오솔길에
순애보 사랑 펼친 그 시절 붉은 연가
아련한 물레방앗간 애달프다 물소리.

<이달의 심사평>

사람살이 온갖 정서
치밀한 관찰로 섬세히 재봉
참 춥다. 그럼에도 평소보다 더 많은 작품들이 응모되었다. 그러나 시조의 본령인 단수의 묘를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오랜 심의 끝에 박한규의 ‘노루발’을 장원으로 뽑기로 했다. 이 시조는 재봉틀의 부속품인 노루발에 대한 치밀한 관찰을 통하여 사람살이의 온갖 정서들을 섬세하게 재봉해낸 가품이다. 감정의 과잉에서 벗어나 어조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시상의 전개에도 무리가 없다. “곱솔”, “시접”, “솔기” 같은 바느질과 관련된 고유어들을 고명처럼 얹어놓은 것도 그런대로 맛이 있었지만, 그것이 과다하거나 부적절하게 놓이게 되면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차상으로 뽑은 류용곤의 ‘달항아리 낳기’는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친 호흡을 토대로 한 역동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시어의 선택에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호령(一號令)” 같은 생경한 한자어는 특히 눈에 거슬렸다. 차하로는 ‘이효석 문학관’에서 느낀 소회를 애틋하게 그려낸 이인환의 ‘이효석 문학관’을 뽑았다. 이 작품에서는 “애절한”, “아련한”, “애달프다” 같은 감정들을 문면에 직접 노출시킨 것이 큰 흠으로 느껴졌다. 시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는 시학의 기본 명제를 곰곰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서재철·류홍·정호순·고경자·김갑주의 시조들이 끝까지 각축을 벌였다. 삼박자를 제대로 갖춘 빼어난 작품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심사위원: 염창권·이종문(대표집필: 이종문)

<초대시조>

찔레꽃 수제비
-박명숙

1.
수제비를 먹을거나 찔레꽃을 따다가
갓맑은 멸치 국물에 꽃잎을 띄울거나
수제비, 각시가 있어 꽃 같은 각시가 있어

2.
거먹구름 아래서 밀반죽을 할거나
장대비 맞으면서 솥물을 잡을거나

수제비, 각시가 있어 누이 같은 각시 있어

한소끔 끓어오르면 당신을 부를거나
쥐도 새도 눈 감기고 당신을 먹일거나

수제비, 각시가 있어 엄마 같은 각시 있어

◆박명숙

박명숙

박명숙

1993년 중앙일보로 시조 등단. 99년 문화일보 자유시 등단. 시조집 『은빛 소나기』『어머니와 어머니가』, 중앙시조대상.

요즘엔 수제비를 맛으로 먹는다. 그러나 수제비의 역사는 슬프다. 내력을 알고 보면 구황식의 하나다.

‘찔레꽃 수제비’는 시조의 가락에 업혀 흉년의 허기를 숨기고 강물처럼 흘러간다. 예쁜 찔레꽃 뒤에는 비의 하나를 감추고 있다. 반복해 읽어 가면 참 멋있는 가락을 따라가다가도 한 순간 목에 작은 가시 하나가 나를 쿡, 찌른다. 찔레꽃은 오월에 핀다. 그리메 짙은 산자락 끝에 흰 옷 입은 조선 여인의 모습으로 찔레꽃이 피면 보릿고개도 절정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찔레순이나 꽃잎까지 먹어도 오월 해 꼬리는 길기만 하다. 그럴 때 “갓맑은 멸치 국물”에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솥물을 잡고 밀반죽을 해서 수제비를 뜯어 넣으며 뱃속의 울음을 달랠 때 찔레꽃은 오히려 사치다. 빼어난 시는 비유를 덧대지 않고도 사구를 활구로 바꾸는 감각을 지닌다. 이 시의 종장마다 압운에 깔린 꽃 같은, 누이 같은, 엄마 같은 여인은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다. 이들은 핍박한 삶의 수레바퀴를 끌고 보릿고개와 전쟁을 넘어 온 전 시대의 여인이고 더 험한 길을 갈 우리 시대의 길잡이다. 시인은 그러나 아무도 나무라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지랖에 수치와 근심을 숨긴 채 찔레꽃 고명을 띄우는 슬기로 구술을 넘어 노래에 다달아 있다. “쥐도 새도 눈 감기고 당신을 먹일거나”라는 감각적 언술은 눈물 글썽하도록 한 시대를 관통한다. 세 수 각 종장마다 동음의 반복을 통한 장치가 음악적 탄력을 유지하면서도 다 말하지 않는 슬픔과 절제된 미학이 오롯하다.

최영효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04513) 또는 e메일(choi.sohyeon@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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