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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중의 퍼스펙티브

정부의 암호화폐 헛발질은 쇄국정책의 재현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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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암호화폐 논란 

“정부는 국민을 보호한다고 생각하지만, 국민은 정부가 꿈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다.”

암호화폐 공개(ICO) 금지 이어 #거래소 전면 폐쇄 논란까지 #한국은 금융산업 고립주의 빠져 #제도권서 문제 푸는 일본에 뒤져 #무분별한 암호화폐 투기 규제하되 #변화된 금융환경을 수용해야 #암호화폐를 제도권으로 끌여들어 #금융 선진국 도약의 발판 삼아야

“이미 선진국에서는 가상화폐에 투자해 더 발전해 나가는 상황에서 대한민국만 타당하지 않은 규제로 인해 경제가 쇠퇴하지 않길 바란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글들이다.

최근 국회 토론회장에서 차관 출신의 방청객이 말했다.

“속아서 엉터리 코인에 투자했습니다. 억울해서 경찰에 고소했지만, 손실을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이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더는 사기를 당하지 않았고, 암호화폐 세상이 멋진 신세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지나친 규제는 옳지 않다는 걸 배웠습니다.”

경찰이나 검찰 등에 암호화폐 사기를 당했다는 사람들의 원성이 넘쳐난다. 암호화폐로 큰 돈을 거머쥔 투자자들이 금융감독원에 갈 리 없다. 당연히 규제기관은 폭주하는 부정적 정보에 휘둘린다. 언론에서는 암호화폐 가격이 연일 폭등 또는 폭락했거나 거품이 많다는 내용을 보도하니, 사람들은 암호화폐에 투기가 극성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 주변에는 돈을 잃었다는 투자자가 한 명도 없다. 약간의 수익을 낸 제자들부터, 수백억 원을 벌었다는 투자자까지 다양하다. 2016년 리플 하나가 7원이었다. 지난해 여름에는 200원 선이었고, 지금 2000원을 호가한다. 2년 전 1억원을 투자했다면 지금 300억원 이상 벌었다.

풍선이 지나치게 부풀면 반드시 터진다. 암호화폐 가격이 무한히 상승할 수 없다. 거품의 정점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버블은 터진 후에야 그게 버블임을 알 수 있다.

진화하는 암호화폐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2009년 출현한 비트코인은 화폐 가운데 가장 진화한 지적 산물이다. 신용카드 결제에는 청산기관이 필요하다. 암호화폐는 청산기관이 없어도 된다. 중앙은행이 암호화폐를 발행하면 시중은행이 사라진다고 한다. 암호화폐는 금융산업을 송두리째 격변시킬 뇌관이다.

2016년 출현한 이더리움은 더 진화했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 자동으로 매달 정해진 날 세금을 내고, 술집에서 쓸 수 없고, 항공기가 두 시간 이상 연착하면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이런 스마트 계약 기능을 기존 화폐에는 심을 수 없다.

디즈니랜드에서 입장권을 사면 손등에 도장을 찍어준다. 그 도장 자국이 달러의 대용품 역할을 한다. 디즈니랜드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입장할 때 그 자국을 보여주면 된다. 그 자국이 암호화폐에서는 토큰이라 불린다. 이더리움 플랫폼에서 다양한 토큰들이 만들어진다.

시가총액 1위 비트코인은 1세대 암호화폐로 불린다. 비트코인을 제외한 나머지 암호화폐를 잡코인(altcoin)이라 칭한다. 시가총액 2위의 이더리움이 2세대다. 그런데 3세대 암호화폐가 출현하고 있다. 암호화폐의 기술적 진보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혁신적이다.

99%의 투자자들은 암호화폐 기술에 관심이 없고 투자에만 집중한다. 나머지 1%는 혁신적 기술을 만들려 애쓴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99%는 e메일 보내고, 검색하고, 쇼핑하고, 채팅하지만, 1%가 기술 진화를 선도한다. 축적된 기술을 보면 암호화폐가 17세기 네덜란드를 경제 공황에 빠뜨린 튤립 버블의 재판이 될 것이라는 우려는 잘못된 것이다.

암호 화폐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처럼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화폐의 정의가 바뀌었고, 기존 경제학 이론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필자의 지인은 미국에 유학 가는 딸에게 반드시 암호화폐 전공 교수를 찾거나, 없다면 지도교수가 암호화폐를 전공하도록 만들라고 충고했다.

싹 나자 규제 나선 한국

2010년 5월 22일 라즐로라는 개발자가 피자 두 판을 주문하는데 비트코인 1만 개를 썼다. 최초로 비트코인을 돈처럼 쓴 이 날을 ‘피자 데이’로 기념한다. 지금 비트코인 시세로 환산하면 200억원에 해당한다. 격변의 시대에는 싹도 나기 전 그 가치를 알아보는 자에게 부가 축적된다.

닷컴 버블이 끝나가던 시점인 2010년, 마윈이 알리바바의 비전을 6분쯤 설명하자 소프트뱅크 창업자 손정의는 2000만 달러(약 214억원)를 투자해 알리바바 지분 34%를 확보했다. 사실상 투기였지만, 손정의의 알리바바 지분 가치는 2014년 알리바바가 뉴욕 증시에 상장되며 580억 달러(약 62조1000억원)로 3000배가량 뛰었다. 역사는 언제나 큰 리스크를 안았을 때 만들어졌다. 돌아보면 구글·페이스북·아마존이 다 그렇게 출현했다.

공학자들은 암호화폐를 법정화폐 또는 화폐로 불러달라고 한 적이 없다. 상품으로 불러달라 한 적도 없다. 시인 김춘수의 표현대로 우리가 그 이름을 불렀을 때 암호화폐가 됐다. 가격이 폭등하고 투자자가 늘자 화폐인지 상품인지 정의하지도 않고 정부는 규제하겠다고 나섰다.

규제의 첫 원칙은 투자자 보호다. 암호화폐 가격을 정부가 나서서 잡으려 하지만, 시장만 왜곡시킬 뿐이다. 거래소를 폐쇄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다. 시장을 건전하게 만들기 위한 실명 확인, 보안 감사, 투자적격업체 선정, 거래소 등록제도 확립 같은 것이 건전한 규제에 속한다.

제도권에서 문제 푸는 일본

한국과 일본의 암호화폐 대응에 대해 구한 말 상황과 대비해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유신이, 한국에서는 쇄국정책이 재현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은 2016년 자금결제법을 개정하고 지난해부터 암호화폐 거래소들을 승인했다. 코인공개(ICO)는 일본의 자금결제법·금융상품거래법을 준수해야 한다. 일본은 제도권 안에서 공개적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

한국은 ICO를 금지했고, 거래소도 폐지하려 한다. 이건 쇄국정책이라기보다 고립주의다. 문재인식 금융고립정책이다. 지금의 암호화폐 환경은 비트코인이 출현한 2009년과 다르다. 투기용 화폐 대용물은 점차 사라지고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동력으로 변하고 있다.

한국의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와 빗썸은 거래 규모 세계 3·4위다. 한국에서 만든 암호토큰 아이콘(ICON)이 시가총액 규모로 20위 안에 들었다. 한국의 거래소 플랫폼을 쓰겠다는 국가가 줄 서고 있다. 첨단 금융기법이 한국에서 개발되고 있다.

한국의 금융 수준이 아프리카 앙골라 수준이라고 비아냥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이 한국을 금융선진국으로 도약시킬 절호의 기회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면서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소니의 장벽을 넘어 삼성전자가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은 최고의 정보통신 기술과 잘 교육된 다수의 엔지니어를 보유하고 있다. 국민은 첨단기술을 빨리 수용한다. 세계 일류 기업들이 첨단제품을 개발한 후 한국에서 테스트한다. 한국에서 통하면 세계에서 통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청년들이 창업자금을 모으려 할 때 약탈적 투자자들에 의해 의욕이 꺾였다. 그런데 백서 한장 들고 ICO를 하면 선의의 투자자금이 모이고, 그 기술을 지지하는 고객이 확보된다. 청년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지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꿈을 이룰 수 있다. 이더리움은 19세 청년이 만들었다.

청년이 백서 한장 내고 한국의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수백억 원의 창업자금을 지원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정부가 지원하지도 못할 거면서 청년의 기회를 가로막으려 하는 조치가 바로 ICO 금지다. 한국의 암호화폐들도 ICO를 통해 수백억원씩 모았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조카 정대선 현대BS&C 사장이 만든 암호화폐 Hdac가 ICO로 2억5800만 달러를 유치해 지난해 세계 ICO 1위를 차지했다. 아이콘도 지난해 4400만 달러를 모았다.

굴뚝산업 시대에는 먼저 회사를 창업해서 실적을 내고, 그 실적을 바탕으로 기업공개(IPO)를 하면서 도약 자금을 모았다. 시간이 곧 돈이며 하루가 다르게 광속으로 기업 환경이 변하는 상황에서 굴뚝산업 모델은 경쟁력이 없다. 정책당국은 새로운 산업 환경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

금융과 공학은 불가분

인간을 흉내 내는 인공지능(AI) 기술을 인간이 개발했다. 그런데 AI 수준이 인간을 압도하려 한다. 공학자들이 없어도 금융산업이 돌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공학자가 없으면 디지털 뱅크 변환이 어렵다. 그 연장선 상에 암호화폐가 있다.

금융 종사자들은 합의 방식, 스마트 계약, 다중서명 등 암호화폐의 근본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선물거래 계약이 스스로 실행되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어야 한다. 블록체인에 축적되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연관 정보와 결합한 빅데이터 분석은 금융의 지평을 한 단계 높일 것이다.

현금 없는 사회의 선두를 달리는 스웨덴처럼 현금이 국민에게 외면당하는 날이 온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암호화폐를 발행하지 않을 경우 거시경제의 불안정성이 야기되고 통화정책 수단이 제한을 받는다. 중앙은행이 직접 암호화폐를 발행할 날이 머지않았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암호화폐로 인해 금융 환경은 크게 변할 수밖에 없다. 전혀 새로운 환경이 도래하고 있으니 한국이 선도국가로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보통신 기술을 금융에 착근시켜야 한다. 창의력을 발휘해 혁신적 금융 상품과 플랫폼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자면 투자자들이 다양한 상품을 경험하고 최고의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암호화폐 산업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선물상품이나 파생상품도 개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런 상품이 암호화폐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

무분별한 암호화폐 투기는 규제돼야 한다. 암호화폐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투자자에게 제공하고, 적격 투자기관을 승인해 안전 상품에 투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새로운 금융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줘야 한다.

정부는 또 투자의 책임이 투자자에게 있음을 알려야 한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김재박 전 야구감독의 명언이 있다. 악성 암호화폐 가격은 반드시 내려간다. 그렇지만 투자의 기회를 사전에 봉쇄해 미래 금융산업의 불씨를 꺼트려 후손에게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김형중 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