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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cm짜리 악기를 60년 넘게 붙든 정재국 명인

중앙일보

입력

“처음엔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합주만 하던 피리로 독주회라는 걸 열고, 게다가 민속악인 산조까지 건드리니까 침범당했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을 거다.” 정재국(76) 피리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재 46호 보유자다. 그는 1973년 열었던 독주회 ‘정재국의 피리산조’를 기억했다. “피리 독주회로는 당연히 최초였고, 당시엔 다른 국악기도 독주회라는 걸 별로 안 하던 때”라고 했다.

피리 명인 정재국. 60년 이상 한뼘 짜리 악기와 보냈다. [사진 예음]

피리 명인 정재국. 60년 이상 한뼘 짜리 악기와 보냈다. [사진 예음]

피리는 정악 합주에만 쓰이던 때였다. 1956년 피리를 처음 불었던 그는 “궁중음악인 정악이 좋아 악기를 시작했는데 만날 합주만 하느라 악기 특색을 나타내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농촌에서 부는 버들피리 정도로만 피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독주자가 되고 싶었고 악기도 독주 악기로 만들어놓는 게 꿈이었다. 그는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작품을 의뢰하고 민속악에도 손을 대면서 피리를 독주 악기로 올려놨다. “마음대로 못하니까 답답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고 했다.
학비를 전부 준다는 말에 멋모르고 들어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재 국악고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피리를 권했다. 피리 부는 소리가 유난히 굳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피리 소리의 화려함을 발견했다. 꿋꿋하고 힘있게 뻗어 나가는 소리가 매력임을 알았다. 그러니 합주에만 만족할 수는 없었다. “합주를 해도 내 소리로 전체를 다 삼키곤 했다. 또 내가 삐끗하면 전체가 무너진다는 게 힘든 일일 수도 있겠지만 희한하게 난 그 점에 자부심이 들더라. 그래서 합주할 때도 일부러 한 옥타브 높여서 불고 그랬다.”

어떡하든 피리로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꾸준히 연구했다. “피리가 한 구멍에서 세음 이상이 나기 때문에 정교하게 불어야 제대로 소리가 난다. 마음속에 있는 음악이 자유롭게 표현되려면 기술을 완벽하게 익혀놔야 한다.” 그는 혼자서 수십 년 동안 자유로워지기 위한 연구를 했다. 20cm 정도 되는 악기를 평생 붙들었다. 1998년엔 피리 정악이라는 분야를 새로 만들면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악기의 한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원래 피리는 두 옥타브 정도밖에 못 냈다. 소리가 단조로워서 특히 현대 청중에게는 매력이 없었다. 근데 악기 꼭대기 쪽에 바늘구멍을 하나 뚫으니 옥타브가 넓어지는 걸 알게 됐다.” 이렇게 개량한 악기로 또 새로운 작품들을 불었다. 그는 “전통을 잘 이어야 하지만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며 “군대에서는 피리로 유행가도 불고 뭐든 다 했다”고 말했다. 지금껏 거쳐간 제자 150명과 현재 제자 50명에게도 원리원칙은 철저하게 가르치지만 "한계를 두지 않고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인이 되라"고 가르친다.

피리와 함께 60년 넘게 지낸 그는 “하늘이 피리와 나를 맺어준 것 같다”고 했다. “우연히 하게 된 악기와 60년 이상 지낼 줄은 몰랐다. 특히 이처럼 내가 봐도 순수 무결 하게 한 길을 걷게 될 줄은 몰랐다.” 정재국 명인은 이 긴 세월을 기념하기 위해 ‘한뼘 피리로 60년 한길’이라는 음반을 발매했다. 평조회상, 가즌회상과 경풍년·상령산풀이를 수록해 독주 악기로서 피리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앨범의 부제는 ‘수탉처럼 울다 ’다. 그는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도 피리 소리에 자신이 있다. 실력이 조금이라도 덜해졌다 싶으면 그만두겠다"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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