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판 '유전무죄'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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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제시카 랄의 자매인 사브리나(왼쪽)와 발사(오른쪽)가 최근 뉴델리에서 열린 촛불 집회에 참석해 고인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뉴델리 AP=연합뉴스]

뉴델리에서 7년 전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놓고 인도 사회가 들끓고 있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유력 정치인의 아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유전무죄'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14일 이번 사건이 인도 시민들로 하여금 빈부 격차와 사회정의에 새삼 눈을 뜨게 했다고 보도했다.

1999년 4월 늦은 밤, 뉴델리의 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패션모델 겸 TV 진행자인 제시카 랄(당시 34세)이 총에 맞아 숨졌다. 정치인.경찰 간부.배우.모델 등 잘나가는 인사가 모인 파티장에서였다. 자정을 넘어 한 남자가 들어와 바에 있던 제시카에게 술을 달라고 했는데 거절당하자 승강이 끝에 권총을 뽑아 들었다. 경찰은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유력 정치인이자 설탕 재벌의 아들인 마누 샤르마(당시 24세)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샤르마와 그를 돕거나 방조한 혐의로 모두 9명이 기소됐다.

7년간의 재판 끝에 2월 말 델리 고등법원은 9명 모두를 무죄로 석방했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였다.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경찰 수사에서 한 진술을 번복했다. 범인의 인상은 물론 입었던 옷까지 자세히 묘사했던 목격자들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모른다"고 발뺌했다.

재판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뉴델리는 물론 인도 곳곳에서 판결 불복종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 극심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평소 남의 일에 무관심하던 뉴델리 시민들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들은 제시카 사건을 다시 판결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언론도 나섰다. 신문들은 매일 1면에서 제시카 사건을 다시 다루고 있다. '부자들은 살인 혐의도 피해 가는가'와 같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NDTV 방송이 살인범을 다시 법정에 세울 것을 탄원하는 캠페인을 벌이자 짧은 시간에 지지를 표시하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20만 건이나 접수됐다. 시위 참가자들은 "누구나 제시카가 될 수 있다"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면 끔찍한 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 분노가 높아지자 만모한 싱 총리도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제시카 사건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피한 채 "사법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한지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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