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총리 이임사 "지난 열흘 폭우에 흠뻑 젖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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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총리가 사과와 함께 20개월여의 총리 생활을 접었다. 3.1절 골프 파문이 터진 이후 보름 만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 이후 최연소 총리(2004년 임명 당시 52세)이자 헌정 사상 전례가 없는 '실세 총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15일 오후 5시30분, 서울 세종로 정부 종합청사 19층 회의실에 마련된 이임식장에 들어서는 이 총리의 모습은 홀가분해 보였다. 간혹 준비한 메모를 보기도 했지만 이임사의 대부분을 원고 없이 빠른 말투로 이어나갔다. 작심한 듯했다. 그 과정에서 이 총리의 속내도 일부 드러났다.

그는 "정당에서 여러 선거를 치르고 공직 생활을 하면서 지금까지 부정한 행위를 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도 그동안 표현을 자제해 왔지만 잘못한 것은 없다는 일종의 항변이다.

그는 "사회 여러 분야가 균형있게 발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분야가 많이 있어 여러 예상치 못 한 우여곡절이 생긴다" "조금만 지나면 어처구니없었구나 하는 일들이 때로 발생한다"는 말로 여론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털어놨다. 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무고함이 밝혀질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총리는 마지막으로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는데 지난 열흘간 폭우가 쏟아져 옷이 흠뻑 젖었다"며 만신창이가 된 심경을 토로했다.

이임사가 끝난 뒤 이 총리는 참석한 공무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부 종합청사 현관으로 내려와서는 총리실 과장급 이상 직원들을 불러 기념사진을 찍은 뒤 곧바로 청사를 빠져나갔다.

이 총리는 이임식을 앞둔 이날 오후 이치범 환경자원공사 사장과 권오승 서울대 교수를 각각 환경부 장관과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에 제청하는 것으로 공식 업무를 마쳤다. 전날 청와대 측과 '환경부 장관과 공정거래위원장 후보를 제청한 후 공식 사표를 제출한다'고 사전 조율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14일 저녁에는 총리실 소속 1급 이상 간부들과 고별 만찬을 했다. 이 총리는 폭탄주가 서너 순배 돌고난 뒤 "대통령께서 오래 끌지 않고 바로 결정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동안의 마음 고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총리는 이어 "참여정부는 성공해야 하며 노무현 대통령은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면서 노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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