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먼 민주화|이호철 <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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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며칠전 모 신문의 1면에 큼지막하게 실린, 누비옷에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여 있는 전경환 씨의 모습은 매우 시사적이었다. 과연 세상은 지난 1년 동안에 바로 저만큼 변했다는 걸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저 일이 저렇게 처리됨으로써 민주화의 터전은 그 테두리가 한 차원 더 커졌다고 보이기도 했다. 사실 작년 4·13부터 끓기 시작하여 6·10, 6·26, 6·29이후 지난 1년 동안의 우리 민주화 역정이 그 사진 한 장에 그야말로 결정으로서 압축되어 있고 함축되어 있었다. 일단 이 일에 관한 한 더 이상 여러 소리가 필요 없어 보였고 우리 국민은 지난 1년 동안에 바로 저것을 쟁취해냈고 빼앗아냈다는 실감이 왈칵 들었다.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흑인 출마자「잭슨」은 『12년 전인 1972년 「맥거번」이 지명을 받은 민주당 대회 때 나는 겨우 허락되어 장내에 들어가 구석자리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금년에 나는 뉴햄프셔에서 그 「맥거번」을 쳐부수었습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것은 미국에서의 흑인 운동의 승리를 함축해서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전경환 씨 구속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난 우리의 충격적인 변화에 비한다면 차라리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변화, 지난 1년 동안의 충격적인 변화의 터전 위에서 작년 연말에 직선제를 통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이제 제6공화국의 첫 국회를 구성할 새 국회의원 선거가 임박해져 바야흐로 각 당에 출진 나팔이 울려 퍼지고 있는데, 정작 그 나팔 소리들은 어째 처음부터 시원치가 않고 전경환씨의 구속 송치라는 결정에 비한다면 훨씬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각 당」이라는 말이 나오게된 사정부터가 곤란한 사정이다. 지난번 대통령선거 이야기는 굳이 거듭하지 않기로 하자.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원천적인 연유는 거기서부터 비롯된다.
도대체 국회의원선거라는 것이 처음부터 맥이 빠져 있다.
출마자들은 곳곳에, 골목마다, 큰길마다 떼지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나 대개는 구태의연한 그 사람들, 뚱뚱한 유지들, 금배지 쪽으로만 욕심 있는 사람이 태반인 것 같다. 통대 대의원 같은 사람들, 어디서나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사람들. 정당 차원의 정책 홍보책자 하나 제대로 내미는 당이 아직은 없다. 그래서인가 출마자들도 하나 같이 조바심으로만 들떠있고, 당당하지 못하고, 심지어 주눅들어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출마자들 서로가 원체 할말은 얇은 냄비 끓듯 언론 쪽이 맡아놓고 다 써버려서 따로 할말도 별로 없다는 셈인가. 닭 개 쳐다보듯 하고, 더러는 저희들끼리 쓸데없이 물고 뜯고 할뿐이다. 피차 과열은 되어 있으나 이렇다할 이슈는 없다.
정작 유권자들은 무엇을 보고 어디에다 붓 뚜껑을 눌러야할는지 어리벙벙하기만 하다.
며칠전의 한 여론조사도 인물 중심으로 찍겠다는 의견이 62·4%, 이것을 다시 세분하면 후보의 정치 노선 및 정치 경력을 고려하겠다는 것이 35%, 인품을 보겠다는 유권자가 27·4%. 여기에다 필자가 한가지 더 덧붙인다면 소위 허깨비 관록보다 새 사람 외주로 뽑아 국회 안에도 새 바람을 불어넣었으면 하는 것이지만, 역시 지난 1년 동안 우리 국민이 빼앗아 낸 그 엄청난 것에 비한다면 우리의 기 정치 풍토라는게 뿌리 깊게 너무너무 잡박해 있어 새삼 맥이 빠진다.
그리하여 며칠 전 경상대생들의 열차 탈취·방화 등 격렬한 시위는 또다시 우리의 눈길을 끈다. 그 시위의 저변에는 우리 언론이 잘 다루지 않아 우리가 평소에 잘 모르는 나름대로의 깊은 사연이 있어 보인다. 바로 그 일을 전후해서 어느 날의 신문은 현대건설이 말레이시아에 건설해놓은 세계에서 네번째로 긴 다리라든가, 우람한 모습을 원색 사진으로 게재해 밖으로 웅비하는 우리 기업의 실태를 보여줘 마음 든든했는데, 그러나 현대 엔진 노조 사건이라는 것의 내용은 우리 국민들 태반이 제대로 알지 못한다.
새마을 비리라는 것은 연일 그렇게도 내리닫이로 보도하면서 그 같은 신문들이 현대엔진노조사건은 왜 그 편린이나마 보도하지 않고 있는가. 도무지 아리딸딸하고 아리송할 뿐이다.
현대 엔진 노조 위원장이던 권용목. 31세. 천안 공고 출신. 그 이상은 필자도 모른다. 그는 지금 다시 갇힌 몸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저간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얇은 냄비 끓듯 하는 언론이 왜 이에 대해서는 끓고 있지 않는가.
모를 일이다. 아니, 모를 일이 아니라 전경환씨의 수갑 차고 포승에 묶여 있는 그 사진이 신문 1면에 큼지막하게 보도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되면 그 어떤 복잡한 저의의 소산이나 아닌가 하고 부쩍 의심까지 든다. 민주화에의 길은 아직도 첩첩 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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