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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씬한 게리 올드만을 뚱뚱한 처칠로 둔갑시켰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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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다키스트 아워’. [사진=UPI 코리아]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다키스트 아워’. [사진=UPI 코리아]

올해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은 ‘다키스트 아워’(17일 개봉, 감독 조 라이트)는 나치 독일이 유럽을 차례로 침공하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에 취임, 중대한 결단을 내리는 윈스턴 처칠 얘기다. 호리호리한 배우 게리 올드만이 배 나온 처칠로 감쪽같이 변신한 배경엔 한국인 패브리케이터(fabricator, 특수의상 제작자) 바네사 리(49, 한국이름 이미경)의 솜씨가 있다. 할리우드에서 14년간 ‘엑스맨’‘어벤져스’‘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의 시작’‘헝거게임’ 등 100편 넘는 영화에 참여해온 그는 e메일 인터뷰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크레딧에 이름이 못 올라가거나 하는 게 무척 서운했는데 지금은 배우들의 고맙다는 한마디가 더 보람되다”고 전했다.

특수의상 전문가 바네사 리 #할리우드서 뛰고 있는 한국인 #‘엑스맨’‘어벤져스’등 100여편 참여

특히 실존 인물이 주인공인 ‘다키스트 아워’는 시작부터 방대한 사전조사를 했다. 그는 “특수분장을 담당한 카즈히로 츠지와 수백 장의 자료를 뒤졌다”며 “처칠 경이 패셔니스타라 양복 사이즈가 남아있어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영화에서 처칠은 정장만 아니라 나이트가운 차림인 장면이 많다. 몸집이 커 보이게 하는 특수의상인 팻수트도 두 가지로 제작해야 했다. “나이트가운용은 많이 힘들었어요. 특수분장이 가슴까지 내려와 수트를 그만큼 잘라야 하기 때문에 며칠 밤을 샌 걸로 기억합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윈스턴 처칠로 변신한 배우 게리 올드만과 바네사 리. [사진 바네사 리]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윈스턴 처칠로 변신한 배우 게리 올드만과 바네사 리. [사진 바네사 리]

이번 팻수트는 폼 라텍스나 마이크로비즈 같은 소재를 처음 활용해 제작, 한결 자연스런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그는 “나도 초창기에는 ‘화면에 멋지면 된다’는 주의였다”며 “딸아이가 연기를 전공하면서부터 좀 더 배우의 입장을 배려하게 됐다. 최고의 연기를 끌어낼 수 있고 보기도 좋은 옷을 만드는 데 노력을 많이 기울인다”고 전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묻자 역시 ‘다키스트 아워’부터 꼽았다. 지난해 그가 차린 특수의상 제작회사 ‘슈퍼수트팩토리’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첫 번째 ‘토르’ 수트도 있죠. 그 팔에 붙인 네모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이 핑글핑글 돌아요. ‘트론’에 나오는 다프트 펑크의 조명 의상, ‘스타트렉’ 우주복…너무 많네요.”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윈스턴 처칠로 변신한 배우 게리 올드만과 바네사 리. [사진 바네사 리]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윈스턴 처칠로 변신한 배우 게리 올드만과 바네사 리. [사진 바네사 리]

한국에서 나고 자란 그는 20대 때인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에 장애가 남은 그가 번번이 직장을 잃고 낙심하자, 어머니가 이민을 결심한 것이다. 현지에서 패턴사로 일하며 가정을 꾸린 그는 서른 넘어 우연히 구인광고를 보고 할리우드에 들어섰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실력으로 지금까지 왔다. 그는 “여기도 인종차별은 있었지만 장애인 차별은 없었다”며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더 많이 배려하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많이 웃어주면 되더라”고 했다.

올해 개봉할 김지운 감독의 ‘인랑’으로 한국영화에도 처음 참여했다. 평소 그와 절친한 미국 특수효과 회사가 작업을 맡게 되자 그에게 전체 수트 제작을 의뢰한 것이다. 그는 “한국영화라고 특별히 저에게 제안한 건데 저도 원래 ‘인랑’ 덕후라서 무조건 맡겠다고 했다”며 “새로운 면도 있어야 하지만 원작의 느낌도 많이 안고 가야 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 실루엣은 유지하되 디테일을 많이 넣었다. 테스트 샷을 보니까 강동원씨가 멋지게 옷맵시를 책임져줘서 아주 보람을 느꼈다”고 밝혔다.

특수의상 전문가로서 흥미로웠던 한국영화로는 ‘부산행’(2016)을 꼽았다. “아직까지도 미국사람들에게 권하고 다녀요. 우리 좀비도 너희 못지않다며.”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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