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독한 남편에 "수백억 재산 내게 줄거죠" "어…어…" 대답만 한 유언은 무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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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998년 1월 대전에서 중견기업을 운영하던 정모(당시 72세)씨는 "모든 재산을 둘째부인에게 넘긴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사망했다. 수백억원대의 정씨 유산이 후처(後妻)인 배모씨에게 모두 상속된다는 사실에 전처(前妻)의 자식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배씨 측 변호사들이 간여한 유언장 작성과정에 문제가 많아 무효"라고 주장했다. 위암 등으로 생명이 위독했던 정씨가 배씨 측이 미리 준비한 유언장 내용을 듣고 경황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하는 정도로 동의했을 뿐이라는 것. 이는 민법상 '구수(口授)증서에 의한 유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민법(1070조)은 '유언자가 질병 등의 이유로 자필로 유언장을 작성할 수 없을 경우 2명 이상의 증인에게 유언을 구술하고 이를 증인이 낭독한 뒤 유언자의 서명을 받는다'고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을 정의하고 있다. 전처의 자식들은 "간병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배씨가 고인의 손을 잡고 유언장에 서명했다"며 배씨 측을 상대로 유언무효확인 청구소송을 냈지만 1,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그러나 대법원1부는 14일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병상에서 사리분별이 힘들었던 정씨가 변호인이 사전에 작성한 유언장에 간략한 답변이나 동작으로 긍정하는 것만으로는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후처 외의 다른 유족을 상속에서 완전히 배제한 내용 등에 비춰볼 때 유언장이 정씨의 진정한 의사와 합치되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변현철 공보관은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정씨의 유언장이 무효가 될 경우 유산은 민법상 상속 순위에 따라 재배분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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