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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리카와 아야의 서울 산책

영화 ‘1987’과 재일한국인 차별 해소 일본 시민운동 ‘무궁화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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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

영화 ‘1987’을 보고 일본도 이렇게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나 생각해봤다. 아마도 60년대 전후가 시민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부모님께 얘기를 듣거나 책과 다큐멘터리를 보고 아는 정도이지만 미·일 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이나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운동 등 평화를 위한 운동이 많았다. 한국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87년 6월처럼 눈에 띄는 성과는 일본에서는 없었던 것 같다. 70년대 이후 시민운동은 그 열정을 잃었다고 봤다.

그런데 올초 일본에 돌아가 만난 두 사람을 통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은 ‘무궁화회(むくげの会)’의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씨. 무궁화회는 71년 결성된 시민 모임이다. 남북한이나 재일 한국인 관련 연구를 해 왔다. 히다씨는 그 창설 멤버이다.

이번에 그를 만난 건 내가 다니는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와의 연구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무궁화회가 열리는 장소이자 히다씨가 관장으로 있는 고베 학생청년센터는 내가 다니던 고베대 근처에 있었다. 한국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나는 무궁화회에 가끔 갔다. 무궁화회는 한달에 두번 모임을 열었고 게스트를 초청해 강연할 때가 많았다. 멤버는 10명 정도로 소규모였지만 유명인사들도 강사로 초청됐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시장이 되기전 강사로 왔었다.

가깝게 지내면서도 무궁화회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이번 인터뷰에서 처음 알았다. 창설 당시 히다씨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시민운동가였다고 한다. 그 활동을 통해 전쟁이나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돼 재일 한국인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됐다. 차별이 심한 시절이었다. 무궁화회는 그 차별 해소를 목표로 재일 한국인을 포함한 남북한 관련 연구를 하는 모임으로 시작한 것이다. 멤버는 대부분 일본 사람이다. 남북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은 모임이지만 간첩으로 의심 받거나 ‘빨갱이’ 소리를 듣는 등 여러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도 “즐거웠다”고 한다. “나에게는 무궁화회가 청춘 그 자체였다”고 소년 같은 맑은 눈으로 얘기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나도 전쟁에 반대했던 그 열정을 무궁화회에서 이어갔던 것이다.

또 한 사람은 오사카에서 영화 배급이나 홍보를 하는 ‘키노키네마’ 사의 대표 키시노 레이코(岸野令子)씨다. 한국영화의 배급과 홍보를 맡을 때가 많아서 신문기자 시절부터 자주 만났다. ‘이바라키의 여름’(전성호감독)이라는 오사카 소재 한국계 민족학교(건국고) 얘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키시노씨가 배급과 홍보를 맡았다. 건국고는 전국 고교종합문화제 향토예능 부문에 매년 오사카 대표로 출전하는 학교다. 한국의 전통예능으로 오사카 대표가 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사카에 재일 한국인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키시노씨는 “이 영화를 일본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적자를 각오하고 배급과 홍보를 맡았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통해서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키시노씨도 히다씨와 같은 세대다. 역시나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었다고 했다. 전쟁 후의 베이비붐 세대로 전쟁을 되풀이하면 안 된다는 뜨거운 마음이 있던 세대다. 그 열정이 차세대로 이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키시노씨는 ‘1987’에 대해 “일본에서는 요즘 나오기 힘든 영화다. 특히 일본의 젊은 세대는 자기 주변 일 외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1987’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흥행하는, 뜨거운 한국이 솔직히 부럽다.

나리카와 아야 일본인 저널리스트(동국대 대학원 재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