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한글 간판 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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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뉴욕시 퀸스의 플러싱은 대표적인 한인 상권지역이다. 몇년 전부터 중국계가 삼삼오오 이 지역 상가건물들을 사들이는 바람에 한인들이 수세에 몰리지만 아직도 동포들의 삶이 끈끈하게 묻어나는 곳이다.

최근 이곳에 한 콜택시회사가 대형 입간판을 내걸었다. 'OO콜택시'라는 회사 이름과 전화번호가 큰 글씨로 쓰여 있다. 그런데 이게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됐다. "한글로만 된 광고판을 내걸 수 있느냐" "무슨 말인지 모르니 답답하다"는 등의 불만이 제기된 것이다.

일부 주민들의 불평을 현지 신문이 기사화하면서 파장은 이어졌다. 한 뉴욕시 의원은 "앞으로는 외국어로만 된 광고판을 시가 단속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주민들은 가게 앞에 내건 작은 간판이야 영어가 있든 없든 관심이 없으나 다중을 상대로 하는 대형 입간판의 글을 읽을 수 없으니 짜증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콜택시회사는 "한인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이기에 한글로만 간판을 만들었다"는 입장이다.

외국어로만 된 광고판이 규정 위반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도 현지 신문이 주민들의 입을 빌려 불법영업의 냄새도 난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자 뉴욕시에서 바로 조사반이 나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영세 한인업체들이 규정 준수에 약한 편이라 이 택시회사도 몇 건의 잘못을 지적당했다고 한다.

한 동포는 "이 지역이 아시아 민족에 의해 장악된 현실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한글 간판 논쟁은 미국에 와서도 미국식으로 살지 않는 한인 사회에 대한 백인들의 불편한 감정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돈벌이와 자녀 교육에만 관심이 있고,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등 미국적 가치는 여전히 멀리 한다는 비판이다. 한인들이 배타적이어서 다른 민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어울리고 싶어도 언어장벽 등으로 어울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올해는 한국인의 미국 이민 1백주년이다. 이젠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미국 사회에 자연스럽게 섞일 때도 되지 않았을까.

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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