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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이 한 땀 한 땀...옷 좀 입는 남자들의 양복 '비스포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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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비스포크 전문점 '레리치'의 마스터 테일러 장한종(73)씨가 고객의 몸에 맞춰 가봉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비스포크 전문점 '레리치'의 마스터 테일러 장한종(73)씨가 고객의 몸에 맞춰 가봉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기성복이 주축을 이루던 남성복 시장에 맞춤양복 붐이 다시 불고 있다. 젊은 층에 ‘고루하다’는 이미지가 강했던 맞춤양복은 이제 ‘나만의 옷’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지닌 매력적인 옷으로 탈바꿈했다. 맞춤양복 중에서도 특히 옷을 만드는 대부분의 공정을 손바느질로 하는 '비스포크' 양복은 장인의 정성이 더해져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어떤 해외 럭셔리 브랜드의 옷보다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소비 주체도 30~40대로 달라졌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비스포크 양복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잘 만든 나만의 옷' 원하는 30~40대에 인기 #만드는 데만 2~3달, 접착심지 안 쓰고 가봉만 2차례 #손바느질로 입는 이 얼굴 가장 돋보이게 하는 형태 찾아 #번거롭지만 개성·취향·가치 모두 만족시키는 옷

한 벌 만드는데 두세 달, "그래도 좋아" 

수제 맞춤인 비스포크 방식으로 만든 남성 정장 재킷. [사진 레리치]

수제 맞춤인 비스포크 방식으로 만든 남성 정장 재킷. [사진 레리치]

12~1월은 원래 맞춤 양복 시장의 비수기다. 추위로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지 않는 데다 이젠 더이상 졸업·입학 시즌에 양복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식이 많은 봄, 가을이 그나마 맞춤 양복점이 바빠지는 시기다.
하지만 지난 1월 12일 찾은 비스포크 양복점 ‘레리치’의 직원들은 계절을 잊은 듯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국내 패션 시장이 모두 힘들다는데 이곳만 예외인 건가 의문이 드는 순간, 직원이 "주문양이 많기도 하지만 한 벌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잠시도 쉴 틈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곳은 손바느질을 기본으로 만든다. 재킷 안에 덧대는 여러 종류의 심지를 붙이는 것부터, 소매를 달고 옷깃 모양을 잡는 모든 과정을 일일이 손으로 꿰맨다. 재봉틀로 봉제하는 것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리다 보니, 패턴·재단을 담당하는 마스터 테일러와 재킷·바지를 만드는 테일러(봉제사) 등 9명의 직원이 한 달 동안 만들 수 있는 옷은 고작해야 35벌이 전부다.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가격은 수트 기준 300만~400만원 대로 높은 편이다. 위치도 아파트와 빌라로 둘러싸인 청담동 주택가 안에 있어 내비게이션을 켜고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도 여기서 양복을 맞추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재킷 안에 손바느질로 덧댄 여러 장의 심지들. '비접착식'이라고 명기하지 않은 맞춤양복 또는 기성복의 경우 이 과정에서 접착체를 사용한다. [사진 레리치]

재킷 안에 손바느질로 덧댄 여러 장의 심지들. '비접착식'이라고 명기하지 않은 맞춤양복 또는 기성복의 경우 이 과정에서 접착체를 사용한다. [사진 레리치]

재킷 원단에 손바느질로 심지를 붙여 놓은 모습. [사진 레리치]

재킷 원단에 손바느질로 심지를 붙여 놓은 모습. [사진 레리치]

한남동에 있는 또 다른 비스포크 전문점 ‘비앤테일러’도 마찬가지다. 종로에서 양복점을 하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양복점을 낸 박창우(39) 이사가 운영하는 곳이다. 200만원부터 1000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양복을 주로 만들지만, 30대 젊은 직장인부터 60~70대 장년층 남성까지 고객층은 다양하다. 정성 들여 만드는 비스포크의 매력 때문이다. 박 이사는 "한 벌을 만드는데 3개월 가량 걸리지만 손님들이 기꺼이 기다려주고 또 만족해한다"고 말했다.

'나만을 위한 옷' 찾는 트렌드에 부활한 맞춤양복

1967년 종로4가에 '보령양복점'이란 맞춤양복점을 열었던 박정열 마스터는 아들(박창우 이사)이 가업을 이어 받으면서 현재는 '비앤테일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사진 비앤테일러]

1967년 종로4가에 '보령양복점'이란 맞춤양복점을 열었던 박정열 마스터는 아들(박창우 이사)이 가업을 이어 받으면서 현재는 '비앤테일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사진 비앤테일러]

국내에 양복점이 들어온 지도 100년이 훌쩍 넘었다. 한국인이 처음 만든 양복점으로 알려진 1903년 ‘한흥양복점’을 시작으로, 대를 이어 지금도 운영 중인 ‘종로양복점’, 재벌가 회장님들의 단골 양복점으로 소문난 ‘장미라사’ 등 70년대까지 많은 양복점이 생겨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기성복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서 맞춤 양복 시장은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한때 '양복거리'로 불렸던 소공동 웨스틴 조선 호텔 앞 거리에서 양복점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기성복에 밀렸던 맞춤 양복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건 2010년대부터다. 이때는 50만~80만 원대의 저가형 맞춤 양복점들이 청담동·논현동 등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발간하는 『트렌드코리아』 2010년 발행본에서는 ‘소비자 개개인에 맞춘 상품을 제공하는 에고노미(자아를 뜻하는 에고와 이코노미의 합성어) 소비시대의 도래로 기성복 대신 맞춤 양복이 다시 붐이 일기 시작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을 위해 만든 옷인 맞춤 양복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레리치 공방의 장인이 양복 재킷의 깃을 손바느질로 연결하고 있다. 재봉틀을 사용하는 것보다 부드럽게 연결되고 또 미묘한 차이까지 잡아낼 수 있다. 임현동 기자

레리치 공방의 장인이 양복 재킷의 깃을 손바느질로 연결하고 있다. 재봉틀을 사용하는 것보다 부드럽게 연결되고 또 미묘한 차이까지 잡아낼 수 있다. 임현동 기자

하얀 가운을 입은 40~50년 경력의 장인들이 쉴새 없이 손을 움직이며 양복을 만들고 있는 레리치 공방의 모습. 임현동 기자

하얀 가운을 입은 40~50년 경력의 장인들이 쉴새 없이 손을 움직이며 양복을 만들고 있는 레리치 공방의 모습. 임현동 기자

이렇게 부활한 맞춤양복 시장은 최근 들어 더 고급화됐다. 저가형 맞춤 양복을 입어본 경험으로 눈높이가 높아진  데다, 브랜드의 이름값보다 개성 있는 디자인과 잘 만든 품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트렌드가 합쳐졌기 때문이다. 그냥 '맞춤'이 아니라 장인이 ‘제대로 만든’ 고급 맞춤복인 비스포크에 주목하는 이유다.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 소장(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은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를 소유하면서 느끼던 만족감을 이제는 자신만의 취향과 가치가 담긴 옷에서 찾는다”고 분석했다.
비스포크 양복이 최근 인기를 얻는 데는 30~40대 젊은 사장들이 맞춤양복 시장에 뛰어들면서 젊은 감각을 더하고, 유럽의 양복기술과 소재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도 도움이 됐다. 한남동 맞춤양복점 '테일러블'의 곽호빈(32) 대표는 지난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세계 남성복 박람회 ‘피티워모’에 다녀왔다. 매년 남성복 트렌드를 조사하기 위해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행사다. 이 외에도 그는 1년에 몇 차례씩 이탈리아 로마와 밀라노, 영국 런던 등을 돌며 트렁크 쇼(소수의 고객을 위해 가방에 옷 샘플을 가져가 보여주는 행사)를 연다. 자신의 양복을 보여주고 또 그들의 기술을 배워오기 위해서다.
레리치의 김대철(43) 대표는 마음에 드는 옷을 만드는 이탈리아 비스포크 공방에 가서 직접 옷을 맞춰보고, 로마에 있는100년 역사의 수제화 공방에서 신발을 사온다. 그는 "점점 더 고급화되고 있는 고객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직접 이탈리아에 가서 옷을 지어본다"며 "올봄엔 아예 심지·패드 등 부자재를 정통 이탈리아 공방 스타일로 전부 교체하고 만드는 방식 또한 더 세심한 손바느질 기법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를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옷

비스포크 방식으로 만든 비앤테일러의 양복. [사진 비앤테일러]

비스포크 방식으로 만든 비앤테일러의 양복. [사진 비앤테일러]

비스포크 양복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2~3달이다. 옷을 주문하기 위해 처음 방문한 후에도 2~3주 간격으로 가봉을 위해 두 차례 더 매장에 들러야 한다. 마지막으로 옷을 찾으러 가는 것까지 합치면 양복 한 벌을 맞추기 위해 총 4번의 시간을 내야 한다.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님에도 비스포크 양복을 맞추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매력은 앞서 말한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란 점이다. 여기에는 세상에서 하나뿐이라는 희소성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다. 굽은 등, 유달리 좁은 어깨 등 체형의 결함을 잘 감출 수 있는 것은 기본. 팔을 앞으로 뺀 채 오래 컴퓨터 작업을 하는 등 움직임이 다른 직업적 특성에 따라서도 옷을 달리 만든다.
‘나를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옷’이란 점도 매력적이다. 곽호빈 테일러블 대표는 "영국엔 비스포크 테일러를 찾아 상담하는 건 내 옷장 컨설팅을 받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며 "나를 가장 돋보이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옷감과 색, 디자인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50년 경력의 장한종(73) 레리치 마스터 테일러는 비스포크 양복을 "입는 이의 가장 멋있는 모습을 끌어낼 수 있는 도구"라고 했다. 입는 사람의 얼굴이 가장 돋보이는 형태를 잡기 위해서는 정교하고 세심한 가봉과 봉제 과정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한 땀씩 손으로 작업하는 비스포크 방식이 가장 적합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어 "접착제나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니 옷이 부드럽고 입체감 또한 자연스럽게 살아난다"며 "이렇게 만든 옷은 10년이 지나도 실루엣이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테일러블 곽호빈 대표. [사진 테일러블]

테일러블 곽호빈 대표. [사진 테일러블]

비앤테일러 박창우 이사. [사진 비앤테일러]

비앤테일러 박창우 이사. [사진 비앤테일러]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레리치, 비앤테일러, 테일러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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