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중·일 '말꼬리 외교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일본이 당장 말꼬리를 잡았다. 이튿날(8일)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외무차관이 왕이(王毅) 주일 중국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렀다.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왕 대사는 다른 일정을 핑계로 거부했다. 외교 관례상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주재국 정부의 부름에 응하고 그들의 의사를 본국에 전달하는 것은 대사 본연의 임무 중 하나다. 야치 차관은 전화로 항의문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의견이 달라도 적절한 표현을 써주길 바란다." 표현은 온건했지만 분위기는 훨씬 험악했다고 한다.

#라운드 2=이번엔 아소 다로(生太郞) 일본 외상이 중국의 '급소'를 건드렸다. 9일 국회에서 "대만은 일본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나라" "민주주의가 성숙해 있고 자유주의 경제를 신봉하는 법치국가"라고 말한 것이다. 문제는 대만을 '나라'로 표현한 것이었다. 대만을 자국의 일부분으로 보는 중국 정부 입장에선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중국'정책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이웃 나라 외상의 입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일본은 197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했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하고 대만은 중국의 영토란 입장을 존중한다"고 천명한 양국 공동선언에 위배되는 말이라고 몰아붙였다. 아소 외상이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라운드 3=야치 외무차관과 왕이 대사가 9일 도쿄 시내에서 비공식 만남을 가졌다. 엎질러진 말을 수습하기는커녕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잘못을 따지기에 바빴다. "외상의 발언은 엄중해야 한다." (왕이 대사) "그건 서로 마찬가지다." (야치 차관)

세 장면을 되짚어 보면 왜 두 나라 관계가 잘 풀리지 않는지 이해가 된다. 두 나라 모두 대국으로서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수준 낮은 자존심 싸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아사히신문이 11일 사설에서 '어린애 싸움'이라고 꼬집었을까.

하지만 외교란 한 방 얻어맞으면 똑같이 되돌려주고, 그러고선 피장파장이라며 덮어버리는 애들 싸움이 아니다. 때로 설득하고 때로 양보하면서 양쪽 모두에 득이 되는 길을 찾는 창조적 게임이어야 한다. 중.일 양국이 협력하면 두 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도 커다란 이익을 안겨줄 텐데 말이다.

예영준 도쿄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