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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중반의 언니가 80·90대 언니들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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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사진전 '두고 왔을 리가 없다'. 이병복 극단 자유 대표의 생전 모습. [사진작가 박영숙]

박영숙 사진전 '두고 왔을 리가 없다'. 이병복 극단 자유 대표의 생전 모습. [사진작가 박영숙]

 “권(옥연)이 중환자실에 드러누워서 날 보고 그러는 거야. ‘여보 미안해 미안해’. 그래서 내가 덥석 엎드려서 ‘왜 미안해? 뭐가 미안해?’ 그랬지. 조금 전까지도 나보고 괜히 병실을 지키고 있지 말고, 집에 가서 쉬고 오라고 했던 사람인데, '미안해 미안해'하면서 그렇게 (갑자기) 눈 감고 갔어. 가는 복도 타고 난 사람….”

한미사진미술관 박영숙 사진전 '두고 왔을 리가 없다' #76세 사진작가 '여성 서사((敍事) 여성 사물(事物)' 시리즈 #7인의 여성을 인터뷰와 동영상으로 기록

 지난달 29일 향년 90세로 작고한 무대미술가이자 극단 자유의 대표인 이병복(1927~2017)씨가 생생한 목소리로 서양화가이자 남편인 고(故) 권옥연 작가가 눈 감던 순간을 이야기한다. 책이 빽빽이 꽂혀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이야기에 취해 큰 몸짓을 섞어 말하던 그는 금방이라도 화면 밖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올 기세다.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영숙 사진전 ‘두고 왔을 리가 없다’에서 만난 이병복 선생의 모습이다. 다른 사진에서 그는 책상에 팔을 괴고 앉아 다른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생각에 잠겨 있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사진 속의 그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 김비함. [사진작가 박영숙]

패션 디자이너 김비함. [사진작가 박영숙]

박영숙(76) 작가가 이번 전시에 풀어놓은 것은 80·90대 여성들 7인의 이야기다. 판소리 명창 최승희,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화가이며 패션 디자이너인 김비함, 종갓집 며느리이자 갤러리 대표인 이은주, 기업인의 아내 박경애 등이다. 보통 사람이 알 수도, 모를 수도 있는 이들이다. 사진과 함께 각 5~22분짜리 인터뷰 동영상도 곁들였다. 이들의 이야기를 곁들인 동영상 덕분에 ‘나이 든 여자들의 수다’로 들썩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7인의 여성에겐 공통점이 있다. 나이 팔십을 넘어 구십 언저리에 있는 이들은 모르는 사람이 거리에서 만났으면 ‘노인’ ‘할머니’로 여겨졌을 거란 점이다. 그러나 박씨가 렌즈를 들이대자 “책 한 권으로 써도 모자랄” 사연들이 쏟아져 나온다. 박씨는 그런 7인을 그들이 가장 편안해 하는 공간에서 촬영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안방이고, 부엌 혹은 거실인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작업실이고, 식당이었다.

명창 최승희. 어린 시절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게 좋았다"는 그는 "할 수 있으면 기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작가 박영숙]

명창 최승희. 어린 시절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게 좋았다"는 그는 "할 수 있으면 기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고 했다. [[사진작가 박영숙]

화려한 한복 차림이 눈에 띄는 최승희 명창은. 어렸을 때 고모를 따라 전주 국악원에 처음 갔을 때 얘기를 들려준다. “나 같은 애가 진보라 치마에다 노란 호박 단 저고리를 입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야. 그 모습에 반하고 말았지. "할 수만 있다면 유성기 기계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노래 부르는 이들처럼 되고 싶었다"는 그, 50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명창’이라 불리게 된 그의 옛날이야기다.

서호미술관 이은주 대표는 종갓집 며느리로 살아온 삶을 들려준다. [사진작가 박영숙]

서호미술관 이은주 대표는 종갓집 며느리로 살아온 삶을 들려준다. [사진작가 박영숙]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북촌 한옥의 안방에서 포즈를 취한 서호미술관 이은주 대표는 종갓집 며느리로 살아온 얘기를 들려준다. 한 해에 셀 수 없이 지내야 했던 제사 이야기에 6·25 때 얘기를 조곤조곤하게 털어놓다. “전란 중이라 제 나이의 (혼인) 상대는 대부분이 낙동강 전투의 총받이에요. 그때는 신랑감이 귀했어요.” 부잣집에 태어나 자랐어도, 험난한 시절까지 비껴갈 수는 없었다. 시대라는 게 그렇다.

서울 성북동에서 20년째 ‘안동할매청국장’을 운영하는 이상주씨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살았다며 이렇게 털어놓는다. “연애라도 실컷 좀 해봤으면 좋았겠다, 그런 생각은 해봤지.”(웃음)

두고 왔을 리가 없다. 사진작가 박영숙

두고 왔을 리가 없다. 사진작가 박영숙

고(故) 김수영(1921~1968) 시인이 생전에 ‘보석 같은 아내’라고 불렀다는 김현경(90)씨는 자신의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보이는 자신의 집 거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나이가 무색하게 형형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김(수영) 시인은 천재였다. 공부하는 태도 역시 허술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는 정직하고 성인 못잖았다”는 얘기를 전한다.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씨. "김 시인은 천재였다"며 그와 함께한 시간을 회고한다. [사진작가 박영숙]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씨. "김 시인은 천재였다"며 그와 함께한 시간을 회고한다. [사진작가 박영숙]

기업인의 아내로 화목한 가정을 꾸려온 박경애씨는 대학 시절 남편과의 비밀 연애 얘기를 들려주며 “감사하다. (이제 남은 세월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서글프기도 하다”며 “(남편과) 하루 사이에 가든지, 같이 가든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기업인의 아내로, 어머니로 삶을 살아온 박경애씨. [사진작가 박영숙]

기업인의 아내로, 어머니로 삶을 살아온 박경애씨. [사진작가 박영숙]

이들의 이야기는 가까운 사람과 추억에 대한 담담한 사연이다. 작가는 7인의 여성들과 마주한 카메라 밖에서 그들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하고, 또 듣는다. 그렇게 포착한 그들의 몸짓과 표정은 자연스럽다. 거친 시간을 거쳐온 이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도, 마음 한 켠에 두었던 아픔도 엿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한탄하지 않는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장남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이 만든 아들의 발 모양 작품을 손에 들고 어루만지는 이병복씨의 표정은 웃는 듯, 눈물이 고여 있는 듯하다.

렌즈에 잡힌 그들의 모습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소소한 것들이다. 그들의 옷과 장신구, 테이블과 책, 혹은 의자 등 가구들. 각기 다르게 살아온 그들의 삶이 묻어나 있다. 작가 박씨가 이번 전시를 ‘여성 서사(敍事) 여성 사물(事物) 시리즈의 첫 번째 프로젝트라 명명한 이유다. 박씨는 앞으로도 나이 든 여성들의 모습을 그들의 사물과 연계시켜 정체성을 탐색하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다.

1975년부터 사진 작업을 해온 그는 ‘마녀’ ‘우리 봇물을 트자’ ‘미친년 프로젝트’ 등을 통해 그동안 흔히 다뤄지지 않았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꾸준히 작업해왔다. 박씨는 “어느 날 갑자기 나이 듦을 받아들인다는 게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왔다”며 “앞서 살아계신 선배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나누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그렇게 기록한 7인의 이야기는 “내 경험으로 아직 알지 못하는 것들을 새롭게, 다르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는”의식이자, ‘70대 중반의 언니’가 ‘80~90대 언니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양효실 비평가는 “작가는 ‘언니들’에게 한없는 애정을 보이며 그들의 삶을 경축한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존재’들에 대해 배우게 된다”며 “나이 든 여성들의 삶과 역사와 교감하고 응원하는 시각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두고 왔을 리가 없다’는 전시 제목은 “그녀들은 최선을 다했다”는 작가의 해석을 담고 있다. 박씨는 “그들은 변화무쌍한 세월을 다 감당해냈다. 일제 강점기와 4.19와 5.16, 낯선 산업사회를 모두 거쳤다. 그들이 험난한 여정을 지나 주어진 소명을 다 하고 여기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감동”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2월 17일까지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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