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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과 역지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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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리네 삶도 그럴 것이다. 최종 목표(그것도 '골'이다)를 향해 전진해 갈 때,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그 관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 최종 수비수인 윙백이 공격에 가담하면 미드필더가 수비수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고, 중앙수비수로 상대의 예봉을 막지 못하면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이들을 더블 볼란테라고 부른다)로 방어 일선을 구축해야 한다. 위치를 바꾸면 관계가 바뀐다. 내가 전진하면 그대가 내 빈자리를 메워야 하고, 그대가 약하면 내가 그대를 도와야 한다. 그게 역지사지 아닌가?

연전에 이광수의 자전소설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접했다. "이미 동정을 잃어버린 그녀와 나와는 하나로 합하여질 수 없다. 여자는 한 번 남자를 접하면 그 혈액에까지 그 남자의 피엣 것이 들어가 온몸의 조직에 변화를 일으킨다고 한다. 여자는 평생에 한 번만 이성을 사랑하게 마련된 것 같다. 두 번, 세 번째 사랑은 암만해도 김이 빠진, 꺼림칙한 구석이 있는 사랑이다." 첫사랑이자 자신의 잘못으로 떠나보냈던 한 여자를 오랜 후에 만났다. 그녀는 과부였는데, 새벽에 떠나려 하자 나를 찾아와 품에 안긴다. 인용한 구절은 그녀를 거절한 뒤 내가 한 생각이다. 몇 년 후 그녀는 자살했고, 나는 그녀와 깨끗한 이별을 했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참 무섭지 않은가? 이광수의 잘못은 친일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처녀(處女)라는 말에는 장소 개념이 들어 있다. 여자를 정복 가능한 땅으로 여기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처녀막.처녀비행.처녀출판.처녀작.처녀지.처녀림…. 역겨운 관용어들이다. 이광수의 생각이 정확히 그렇다. 첫사랑의 상대를 독립된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고 더럽혀진(?) 살덩어리로 여긴 것, 타인과의 만남을 관계의 형식으로 보지 않은 것, 세상을 제 기준으로만 판단한 것이다.

나는 용감하고 순수하며 세심하고 열정적이고 절제하며 불의를 참지 못한다. 그러나 이 덕목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면, 그는 무모하고 단순하며 소심하고 욕정적이고 억압돼 있으며 분노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 된다. 중요한 것은 덕목이 아니라 누가 주인인가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덕목을 고르는 일이 필요한 때다. 지금도 주변에는 "여보, 사랑해, 재떨이 좀 가져와"라고 말하는 가장이 많지 않은가? 사랑이 명령의 근거가 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2002년에 우리 모두는 한 몸이라고 느꼈다. 아니, 우리는 정말로 한 몸이었다. 골이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모르는 여자와 낯선 남자를 부둥켜안고 울고 웃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교환하는 역지사지의 즐거움을 느꼈다. 그 아름다운 축제가 다시 다가오고 있다. 박지성의 포지션만 교환되는 게 아니라 한국어를 쓰는 우리 모두가 서로 입지를 교환하는 그런 축제 말이다.

권혁웅 한양여대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