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여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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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여백'- 도종환(1954~ )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빼곡한 숲처럼 정글처럼 살지 말자. 털어내고 덜어내어 공백을 가슴속에 만들자. 항아리의 오목한 허공도 좋다. 백지(白紙)여도 좋다. 나의 빈 곳으로 언제든 당신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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