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 속으로] 소설로 되살아난 이한열 운동화 … 그날의 현장은 추억담이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책으로 읽는 영화 │ 1987

L의 운동화

L의 운동화

L의 운동화
김숨 지음, 민음사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은 뜨거운 그 날의 역사를 기록한다. 영화의 엔딩은 노래 ‘그날이 오면’을 배경으로 1987년 6월의 실제 기록 사진들이 장식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87년체제의 신화를 읽거나 자기 만족적인 노스탤지어에 젖기도 했지만, 영화가 의도한 것은 딱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1987년에 대한 기억은 이후 이어진 배신과 반동의 역사를 함께 상기하지 않고는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영화에서 내가 87년체제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회한과 상실감을 읽은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이겠다.

영화에는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죽어가는 이한열의 발에서 벗겨진 운동화 한짝이 클로즈업된다. 김숨의 장편소설 『L의 운동화』는 28년이 흐른 후 눌리고 찌그러지고 세월에 침식돼 부서져 가는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 한 복원사의 이야기다. 소설은 운동화의 복원 과정과 절차를 꼼꼼히 기록한다. ‘기억은 신발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복원사인 화자는 알고 있었다. 그가 복원하는 것은 28년 전 이한열이 신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그 후의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 담아내는 것이다.

영화와 소설로 그려진 이한열의 마지막 운동화. [사진 이한열기념사업회]

영화와 소설로 그려진 이한열의 마지막 운동화. [사진 이한열기념사업회]

기억이란 과거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과거를 구원하려는 현재의 안간힘이다. 『L의 운동화』에서 작가는 그때 비로소 과거는 잠에서 깨어나 우리에게 응답한다고 말한다. ‘나’는 L의 운동화를 복원하면서 무엇을 하는가? “여전히 작업하는 시간보다 지켜보는 시간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그 조용한 기다림과 성찰의 마음이 L의 운동화를 움직인다. “L의 운동화는 싸우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 살고 싶어 하는 ‘의지’가 L의 운동화에 발생한 것이다.”

그뿐일까. 소설은 그날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의 운동화를 주운 한 여학생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녀는 운동화를 찾아주려고 병원까지 따라가 응급실 한쪽에서 밤 11시까지 기다리다 L의 어머니에게 운동화 한 짝을 전해주고 돌아섰다. 이게 있어야 집에 갈 텐데 싶어서 찌그러진 운동화 한 짝을 꼭 들고 응급실 한쪽에 서서 애타게 기다리던 그 마음. 작가에 따르면 28년 동안 L의 운동화를 버티게 해준 것은 바로 그 마음이다. 과거는 그 마음과 기다림이, 그리고 오늘에 대한 반성이 쌓이고 쌓여 애타게 손을 내밀 때 비로소 망각에서 깨어난다. 신화화와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어쩌면 그 마음 한 조각이, 우리의 과거를 구원해줄지도 모른다.

김영찬 문학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