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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빈민가 여성 둘의 60년 우정 … 사랑과 욕망의 이탈리아 현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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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DEEP INSIDE │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나폴리 4부작

나폴리 4부작

나폴리 4부작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

얼굴 드러내지 않는 ‘복면 작가’ #타임 ‘세계 영향력 100대 인물’ #총 4권 2400페이지 대하소설 #20세기 한국사 돌아보는 기분 #여성은 "내 얘기다" 공감 클 듯 #남성은 여성의 내면 엿볼 수도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2016년 4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를 선정했다. 페란테를 소개한 기사 제목은 ‘나폴리의 시인(The bard of Naples)’이었다. 중의법이 사용됐다. 영어 ‘바드(bard)’가 소문자로 시작하면 시인, 대문자(Bard)로 시작하면 셰익스피어를 지칭한다. 페란테는 셰익스피어 못지않게 저자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인물이다.

엘레나 페란테는 필명이다.(엘레나의 유래는 제우스의 딸 ‘헬레나’다. 페란테의 뜻은 ‘과감한 여정’이다.) 1992년 작가로 데뷔할 때부터 사용했다. “일단 출간된 책들은 저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페란테는 자신의 모습을 극구 감춘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려 서면 인터뷰만 한다. 그마저도 잘 안 한다. 2016년 12월에는 스페인 일간지 엘문도에 가짜 인터뷰까지 실렸다.

‘복면 작가’인 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학자들이 내용분석 기법을 활용해 그의 작품을 분석했다. ‘페란테는 사실 남자다’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가 나폴리 출신이라는 것 외에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2016년 10월 어느 이탈리아의 탐사보도 전문 기자가 그의 정체를 밝혔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했던 독자들은 막상 작가에 대한 실마리가 잡히자 분노했다.

최근 『나폴리 4부작』의 제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가 우리말로 출간됐다. 『나폴리 4부작』은 한글판 기준으로 2400페이지에 달하는 대하소설이다. 이탈리아식 막장 연속극으로 볼 수도 있다. 일종의 페미니즘 소설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미국·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독자들이 제4편을 손꼽아 기다렸다. 막상 마지막 권이 나오자 일부 독자들은 ‘차마 읽을 수 없다’고 반응했다. 사는 낙이 하나 사라지기 때문이다. 광팬들은 ‘『나폴리 4부작』 금단 현상’이 두려웠다.

이러한 중독성과 열광적인 반응의 비결이 뭘까. 우선 ‘어? 이거 내 이야기네’라는 공감대를 자극하는 데 있다. 저자는 운명, 배신, 용서, 계급, 인생의 의미, 우정, 사랑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들을 질리지 않게 잘 요리한다. 그는 간결한 대화체 문장을 도구 삼아 세밀한 감정 묘사를 능수능란하게 펼쳐낸다. 페란테에게 성역은 없다. 독자들 마음 깊은 곳에 감춰진 불편한 감정과 기억을 은근하면서도 무자비하게 파헤친다.

현대 나폴리의 풍광. 작품의 배경인 나폴리에서는 현대와 전통이 공존한다. 1960~70년대의 나폴리는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맞붙은 현장이었다. [사진 한길사]

현대 나폴리의 풍광. 작품의 배경인 나폴리에서는 현대와 전통이 공존한다. 1960~70년대의 나폴리는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맞붙은 현장이었다. [사진 한길사]

한국 독자들은 묘한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파시즘이라는 이탈리아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 문제, 공산주의의 위협, 경제성장 속에서 변모하는 고향이 배경에 깔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반도 국가인 이탈리아의 현대사는 한국 현대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역사에 밝은 독자라면, 양국 현대사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포착하는 재미를 맛볼 것이다. 제3권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들은 위정자들의 무관심과 부패와 탄압으로 죽어가면서도 선거철이 되면 자신들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정치인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제4권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릴라는 나폴리에서는 여전히 역겨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왕정복고주의자든 파시스트든 기독교민주당이든 자신들이 저지른 더러운 일에 대해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지금 좌파들이 하는 것처럼 과거 일을 덮고 넘어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폴리는 점주들이나, 시청 관료, 변호사, 회계사, 은행이 차지하게 될 거라고 했다.”

『나폴리 4부작』의 핵심은 두 여성의 60년 우정이다. 1권 『나의 눈부신 친구』는 주인공 엘레나와 릴라의 유년기,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청년기, 3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장년기를 따라 흐른다. 둘 다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결혼·불륜·이혼·출산·육아를 힘들게 헤쳐나간다. 페란테는 ‘온건한’ 페미니스트다.

작품의 시공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나폴리의 빈민가다. 이웃의 숟가락, 젓가락 개수까지 다 꿰고 있는 공동체다. 주민들은 가난과 조직범죄의 그늘에서 신음한다. 살인·폭행·강간이 난무하는 동네다.

66세인 릴라와 엘레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단짝이다. 릴라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 엘레나의 아버지는 시청 수위다. 엘레나와 릴라는 평생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서로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다. 같은 남자를 사랑하기도 한다. 성격이 대조적인 둘은 상호 보완 관계다.

일방적인 종속 관계이기도 하다. 둘 다 똑똑하지만 릴라가 더 똑똑하다. 둘 다 아름답지만, 릴라가 더 매력적이다. 릴라는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다. 릴라는 ‘경계가 허물어지는’ 특이한 체험을 하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엘레나가 노력해야 달성할 수 있는 일들이 릴라에게는 ‘땅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쉽다.

릴라에게는 사악한 면도 있다. ‘나쁜 여자’다. 릴라는 엘레나를 교묘하게 통제한다. 치밀하고 기기묘묘한 수를 쓴다. 엘레나는 릴라의 그림자를 항상 의식한다. 릴라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엘레나는 길을 걷거나 책을 읽을 때도 릴라를 떠올린다. 시종일관 릴라 때문에 생긴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엘레나가 22세 때 쓴 베스트셀러 소설 또한 뒤늦게 깨닫고 보니 주요 모티브가 릴라가 10세 때 쓴 ‘소설’에서 나왔다. 릴라가 챔피언, 엘레나가 도전자다. 둘 다 끌어당기는 힘이 있지만, 카리스마 있는 인물은 역시 릴라다.

릴라는 고향 나폴리에 남고 엘레나는 떠난다. 엘레나는 대학까지 마치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다. 릴라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16세에 결혼한다. 릴라의 인생이 더 파란만장하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컴퓨터 사업에 진출하기도 한다.

『나폴리 4부작』의 제1권은 릴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릴라는 자신의 컴퓨터·옷뿐만 아니라 사진에서 자신의 얼굴을 도려내고 증발한다. 이 증발 미스터리가 『나폴리 4부작』을 계속 읽게 하는 추동력이다.

증발 전 릴라가 엘레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래도 나는 못 당할 걸?”이었다. 제4권의 마지막에 나오는 ‘에필로그-반환’에서 릴라가 다시 자신의 존재를 기발하게 드러낸다. 상당수 평론가는 결말이 ‘눈부시다(brilliant)’라고 평가한다. 글쎄. 아쉬움도 있다. ‘독자’라는 이름의 ‘소비자’가 왕이다. 페란테가 독자들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 제5권에 착수할 수도 있겠다.

‘에필로그-반환’의 핵심은 어쩌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비록 가상 인물들이긴 하지만, 60년 우정을 자랑하는 엘레나와 릴라는 증발 사건을 계기로 각자 진정한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었을까. 4권에서 끝에서 두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소설과 달리 진짜 인생은 일단 지나간 후에는 명확해지기보다 모호해지는 법이다.”

최근 영미권 독서계를 강타한 ‘메이드 인 유럽’ 소설은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과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이다. 평론가들은 두 소설을 도마에 올려놓고 비교한다. 페란테는 여자 작가, 크나우스고르는 남자 작가다. 두 작품은 남녀를 초월해 문학 세계에서 지지자들을 확보했다.

『나폴리 4부작』의 열혈 독자 중에는 여성 독자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남성 독자들에게 『나폴리 4부작』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보면 남자들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책이다. ‘여성 심리를 들여다보는 창’의 구실을 할 수도 있다.

글쓰기에 대해 엘레나 페란테는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는 최대한의 야망, 최대한의 대담성, 그리고 잘 계획된 반항을 요구한다.” 페란테는 『나폴리 4부작』 쓰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한 번에 50~100페이지씩 쉬거나 고치지 않고 써 내려 갔다.

자기계발서 작가 중 상당수는 자신의 꿈을 머릿속으로 되뇌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로 적어보는 게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다. 페란테 또한 어렸을 때부터 꿈을 글로 적는 습관이 있었다. 페란테는 모든 이들에게 이 습관을 권장한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지인들의 ‘강추’로 『나폴리 4부작』을 읽게 된 독자라면 우선 권마다 나오는 ‘등장인물’을 숙지해야 한다. 체룰로·그레코·카라치·펠루소·카푸초·사라토레·스칸노·솔라라·스파뉴올로 집안 인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친숙해져야 한다. 이탈리아어와 언어적으로 친족 관계인 영어를 사용하는 독자들도 상당수는 이 ‘장벽’을 넘지 못했다.

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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