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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 1100년, ‘직지’를 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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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문화스포츠 담당

박정호 문화스포츠 담당

지난해 3월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민병찬 학예연구실장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고문서 담당관 로랑 에리세를 만났다. 에리세는 2011년 프랑스에 있던 외규장각 의궤 한국 영구 임대 당시 실무 총괄을 맡은 지한파다. 민 실장이 입을 열었다.

한국에 한 번도 온 적 없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책 #국내법 미비로 프랑스 도서관 측 “빌려줄 수 없다”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이하 『 직지』)이 한국에 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한국인이 꼭 보고 싶어 합니다.” “공감합니다. 그런데 빌려 간 문화재를 반드시 돌려준다는, 즉 압류에서 면제한다는 법률이 한국에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보증하는 국제협약서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법부터 정비해주었으면 합니다.”

민 실장이 『직지』 대여를 요청한 것은 올 12월 열릴 ‘대고려전’(가칭) 특별전 때문이다. 2018년 고려 건국 1100년을 기념해 국내외 고려 명품을 한자리에 모을 예정이다. ‘금속활자 종주국’ 고려를 상징하는 『직지』를 빠뜨릴 수 없었다.

프랑스뿐만이 아니다. 중앙박물관은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송·원나라 유물 대여를 부탁했다. 고려와 중국의 문화 교류를 폭넓게 짚어보기 위해서다. 대만의 대답은 더욱 강경했다. “해외 문화재 압류 면제법이 있나요. 없다면 절대 불가입니다.” 일본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 박물관·사찰 등에 흩어진 고려불화를 빌려오고 싶었으나 일본 문화청은 “지금으로선 어렵겠다”고 답했다.

우리로서도 할 말이 별로 없다. 국내 절도범들이 2012년 일본 쓰시마에서 몰래 훔쳐온 고려 금동관음보살좌상을 지난해 대전지법이 불상 조성지인 충남 서산 부석사로 인도하라고 판결하면서 외국 박물관·미술관들이 작품 대여에 몸을 사리고 있다. 해외 소재 한국 문화재 전시는 물론 외국과의 문화재 교류도 위축된 상태다.

1377년 간행된 『직지』는 고려의 얼굴이다. 청자·불화·대장경 등 고려의 보물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칠만하다. 독일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로 찍은 책이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또 『직지』는 도난 문화재가 아니다. 구한말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가 구입해 프랑스로 가져갔다. 1911년 골동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가 경매에서 사들여 프랑스 도서관에 기증했다. 고(故) 박병선(1929~2011) 박사가 도서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것을 발견해 72년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직지』의 고향인 청주시에서도 그간 다섯 차례 대여 신청을 했지만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국외 소재 우리 문화재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화두도 『직지』였다. 전문가들은 국외 문화재의 한시적 압류 면제 도입에 대해 공감했다. 성봉근 서경대 교수는 “국민의 문화 향유권 확대 차원에서 관련법을 손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외국에서도 이미 비슷한 제도를 시행 중이다. 프랑스·독일·일본·미국·스위스·벨기에 등에서 순수 전시 목적으로 빌려온 작품은 반입부터 반출까지 통상 12개월 이내에 되돌려준다는 조항을 명문화했다.

국내에서도 현재 관련법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일부 조항을 개정하면 된다. 중앙박물관 측은 다음 달 임시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꼭 중앙박물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불법·적법 유출 여부를 떠나 16만8000여 점에 이르는 해외 소재 한국 문화재를 우리가 보다 편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선(先) 전시, 후(後) 환수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문화의 생명은 교류다. ‘코리아 한국’을 세계에 처음 알린 고려의 저력도 외국 문화에 대한 개방정책에서 비롯했다. 국외 문화재 반환만 고집하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수 있다. 게다가 ‘직지의 고장’ 청주는 지난해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설치 지역으로 결정됐다. 우리 문화에 대한 보다 당당한 마음씨가 필요한 시점이다. 과연 올 연말에 『직지』를 직접 볼 수 있을까.

박정호 문화스포츠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