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49. 영화배우 ‘외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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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6년에 히트한 김완선의 '리듬 속의 그 춤을'은 필자의 작품이다. 기타 반주는 아들 대철이 맡았다.

1975년 개봉된 영화 '미인'에 이남이 등 '엽전들' 멤버와 함께 출연했다. 그러나 얼마 뒤 활동이 금지되는 바람에 영화는 빛을 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연기가 음악보다 훨씬 어려웠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특히 우는 장면은 정말 힘들었다. 다른 건 그냥 흉내를 내겠는데 눈물 연기만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다른 멤버들만 울게 하고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울면 눈물이 맺히긴 한다. 흐르는 게 아니라 눈을 적시는 정도다. 겉으로 우는 것보다 마음으로 우는 게 더 슬픈 것 아닌가. 그게 진짜 울음인데 말이다.

영화를 찍으며 감독과 자주 다퉜다.

"아니, 영화를 꼭 천하게 찍어야 합니까? 국산이면 다 그렇게 해야합니까?"

"그렇게 안 하면 지방 극장에서 안 사간다니까요…."

그땐 영화 흥행의 칼자루를 지방 극장주가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엔 영화인이건 음악인이건 나름의 수준이 있었다. 육체적이기보다는 정신적인 시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음악만 해도 지금은 생각없이 몸만 흔들어대고 땀을 흘리는 쪽으로 너무 치우친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댄스 음악 모두를 우습게 보는 건 아니다. 김추자도 '최초의 댄스 가수'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무대에서 열정적인 가수 아니었던가.

나 역시 본격적인 댄스 음악을 만든 적이 있었다. 80년대 말이었다. 김완선이 매니저와 함께 곡을 받겠다며 우드스탁을 찾아왔다. TV에서 몇 번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춤추는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떠오른 제목이 '리듬 속의 그 춤을'이었다. 직접 만나봐도 역시 그 이미지가 딱 들어맞았다. 전형적인 댄스곡은 잘 안 만들던 나였지만 곧바로 곡 작업에 착수했다.

'현대 음율 속에서 순간 속에 보이는/ 너의 새로운 춤에 마음을 뺏긴다오…'

리듬 위주로 육체적인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는 게 현대의 평균적인 댄스 음악이다. 그러나 나는 록을 했던 사람이라 정신적인 음악에서 떠날 수 없었다. 아무리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라도 관능적이고 인간적인, 또 정신적인 면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히 '리듬 속의 그 춤을'은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아마 80년대 이후 내가 발표한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곡일 것이다.

나는 대중이 좋아하면 일단 만족한다.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대중이 외면하면 명곡이 될 수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간혹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 무어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신중현이 자신의 어떤 곡을 제일 좋아한다더라'는 이야기는 대개 기자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기자가 "저는 이 곡이 좋던데요"라고 말하면 나도 "예, 저도 좋아합니다"라고 답하곤 했다.

어떤 곡이건 그 나름의 개성이 있다. 이 곡은 이 곡대로 좋고, 저 곡은 저 곡대로 특색이 있는 것이다. 펄시스터즈나 김추자의 노래가 지금은 좀 촌스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기에, 그 감각을 갖고 가수와 합작해 만든 그 작품은 그때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었을 곡이다. 음악은 정확하고 빠르게 그 시대를 반영한다. 그래서 모든 곡들이 하나하나 소중하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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