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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안보에 필요한 나라와 손 잡아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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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호 31면

참 어려운 한 해였다. 대통령을 탄핵했다. 북한이 6차 핵실험으로 핵무기를 완성했다. 미국 전역을 사정권에 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발사했다. 한반도 안보 지형이 완전히 달라졌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위안부 문제가 한·중, 한·일 관계를 흔들었다. 적폐 청산, 탈원전 등 정책 뒤집기…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좋은 나라도, 나쁜 나라도 없어 #잠깐 현실 눈감으면 구한말 재현 #정권마다 정책 다를 수 있지만 #외교 합의를 뒤집을 순 없어 #손해 봐도 약속 지킨다는 믿음이 #상대 국민의 마음 얻는 길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 아닌가. 갑자기 대선을 치렀다. 새 정부를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새해에는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당장 평창 동계올림픽이 다급하다. 88 올림픽은 도약의 계기였다. 선진국에서는 동계올림픽이 더 인기다. 북한의 위협, 껄끄러운 외교 현안이 참여 폭을 죄고 있다.

6월에는 지방선거다. 2020년 총선까지 정국의 흐름을 좌우한다. 문재인 정부가 초반에 동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개헌 여부도 국정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선고도 기다린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을 찾아다니면서 촛불 정신을 북돋우고 촛불민심을 살피며 촛불 혁명 완수를 다짐하는 발언을 계속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을의 초심을 간직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전의 ‘불통정부’를 생각하면 꼭 필요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선거 분위기에만 빠져 있는 것은 문제다. ‘인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국정 운영자로서 정책의 결과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문 대통령은 18일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새 정부의 외교를 관통하는 최고의 가치는 국익과 국민”이라고 말했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외교의 방향을 정하라”고 주문했다. “난제(難題)일수록 국민의 상식, 국민의 지혜에서 답을 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익을 ‘실리’라고 한다면 국민은 ‘명분’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국익의 기준은 국민”이라고 했다. 결국 명분론으로 회귀한다. 그렇지만 국제 정치는 도덕적 기준만으로 재단할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 조지 W 부시 정부와 북한의 대화를 촉구하며 “대화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다. 국가 이익을 위해 필요하면 악마와도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88 올림픽 때다. 개막식에서 각국 선수단이 국기를 앞세우고 입장했다. 미국 선수단이 들어왔다.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으며 자유분방했다.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졌다. 러시아(당시 소련) 선수단은 군인처럼 줄지어 들어섰다. 국교가 없던 소련 선수단의 참가가 관심을 끌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 모습이 전 세계에 고스란히 중계됐다. 당시 개막식을 준비했던 문체부 간부는 “진땀이 났다”고 기억했다.

문 대통령은 공관장들에게 “주재국 국민의 마음을 얻는 외교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개막식 중계를 보는 러시아 국민은 흡족했을 게다. 미국 국민은 어땠을까. 평창 올림픽에서는 어떨까. 중국 선수와 일본 선수가 싸울 때 일방적으로 중국 선수를 응원하지는 않을까.

좋은 나라도, 나쁜 나라도 없다. 외교는 좋은 나라가 아니라 우리 안보에 필요한 나라와 손을 잡는 것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균형 외교라고 해도 북한 변수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은 주자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주자의 주석을 조금만 벗어나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일본 개화기 쇄국론자였던 존왕양이(尊王攘夷)파는 적극적인 개화파로 바뀌어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다. 주자학자들이 ‘고학(古學)’ ‘국학(國學)’으로, ‘난학(蘭學)’으로 발전한 것은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한 덕분이다. 외교·안보야말로 현실에 잠깐 눈감는 사이 구한말 같은 일이 벌어진다.

출발은 자기 처지를 냉철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중국을 국빈 방문하고도 문 대통령이 8번이나 ‘혼밥’한 것은 굴욕적이다. 하지만 그게 문 대통령만의 잘못은 아니다. 다만 굳이 그런 일정으로 가야 했는지 아쉬움은 남는다.  그것도 실리 때문이다. 사드 보복을 풀려고 그런 모욕을 참고,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도 포기했다. 그게 국제정치다. 상대가 일본이라도 그랬을까. 굳이 난징대학살 기념일에 중국을 찾아가 제3국을 같이 욕해야 했을까.

외교는 정부가 하는 것이다. 정권마다 정책 방향이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외교 합의를 손바닥 뒤집듯 할 수는 없다. 6ㆍ15공동선언, 10ㆍ4선언이 정권이 바뀌었다고 휴짓조각이 되나. 그런 정부와 누가 합의하려 하겠나. 사드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3불(不)’이라는 덤터기만 썼다. 지난 정부 일로 넘겼으면 부담을 덜었을 일이다.

위안부 문제도 다시 들쑤셨다. 외교 관례를 깨고 이면 합의까지 공개했다. 5년마다 공개되고, 뒤집어질 외교 협상이라면 시작부터 어려워진다.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를 전전(戰前) 정부 일이라고 모르는 일로 치부할 수 있나. 박근혜 정부 때처럼 정상회담도 거부하고, 양국 관계를 모두 정지시켜야 하나. 김종필-오히라 회담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합의가 어려운 부분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외교에서 엉너리는 안 통한다. 민감한 국익이 걸려 있는데 어벌쩡 넘어갈 수 없다. 외교적 수사는 완곡한 표현일 뿐 메시지는 분명해야 한다. 적어도 달라지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데 워싱턴에서 한 말과 베이징에서 한 뉘앙스가 일반인이 듣기에도 다르다. 중국 TV를 무례하게 만든 요인이다.

마음을 얻는 방법은 밥을 같이 먹고, 노래를 불러주는 게 다가 아니다. 한번 말한 것은 손해를 보더라도 꼭 지킨다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누구의 마음을 얻고, 누구의 마음에 상처를 줄 것인가.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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