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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세상을 바꾸려면 글을 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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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한 해가 끝난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마무리 주간에 ‘500주년 기념 교회’의 송길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가짜 뉴스, 거짓 정보가 넘쳐난다. 왜곡된 사실, 상처투성이 진실로 세상은 어지럽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루터의 개혁은 글과 말의 힘으로 시작했다.”

루터 종교개혁은 글의 힘으로 #조지 오웰 “왜 나는 쓰는가” #진실을 향한 분노의 정치투쟁 #“진실의 적은 그럴듯한 신화” #글쓰기는 균형의 미학 제공 #가짜 뉴스·편향 정보 퇴출시켜

루터는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펜을 들고 그리고 써라”고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뒷받침됐다. 1517년 루터의 인쇄된 반박문은 대중 속으로 퍼졌다. 루터의 글은 세상을 바꿨다.

루터의 글쓰기는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를 떠올린다. 오웰의 그 에세이는 집필 동기를 네 개로 분류했다. ‘순전한 이기주의,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impulse), 정치적 목적’이다. ‘정치적 목적’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구다. 그것은 그의 작가적 삶의 동력이다. 그의 갈망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르포소설이다. 그는 그 소설을 “솔직히(frankly) 정치적 책”이라고 했다. 오웰은 영국의 사회주의자다. 그는 스페인 내전(1936~39)에 뛰어들었다. 그는 인민전선의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이었다. 그는 저격수 총에 쓰러졌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혁명의 속성은 타락과 배신이다. 인민전선 내부는 분열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통일노동자 당원도 숙청했다. 오웰은 수배자 신세로 탈출했다. 『카탈루냐 찬가』는 그런 경험과 환멸을 담았다. 그 시절 영국의 지식인 대다수는 오웰을 외면한다. 그것은 무지와 순진함의 발로였다. 알면서도 소련의 거짓 선동에 종사했다. 폭로의 용기가 부족하기도 했다.

박보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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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은 레닌 혁명의 환상을 깼다. 그는 공산주의식 공포정치와 인간성 말살, 대중조작의 속성을 간파했다. 그런 내용의 책들이 『동물농장』, 『1984년』이다. 그 글쓰기는 정치적 투쟁이었다. 가짜 뉴스, 편향된 시각, 강요된 이념에 맞선 고발과 저항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묵시록(黙示錄)으로 작동했다.

오웰은 “좋은 산문은 유리창(window pane)과 같다”고 했다. 그 창은 세상을 제대로 보게 한다. 그의 글쓰기 동기의 경계는 뚜렷지 않다. 중앙일보 독자(정은호, 57세, 전직 금융인)가 쿠바여행기를 보내왔다. 그 여행기는 흥미롭고 사실적이다. “지난여름에 갔던 쿠바 수도 아바나는 깊숙이 들어갈수록 실망이었다. ‘의료 천국 쿠바’는 엉터리 정보였다. 쿠바의 의사 숫자는 중남미에서 상대적으로 많다. 그런데 보건소를 가 보니 의약품이 절대 부족했다. 기본적인 의료행위도 힘들다. 쿠바가 유기농을 한다는 이야기는 크게 과장된 뉴스다. 거의가 비료·농약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기농을 한다.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난 것은 피델 카스트와의 노선갈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의 삶에 극적인 신화를 입혔다.”

올해가 체 게바라 사망 50주년이다. 인터넷 속 쿠바의 정보는 낡았다. 독자의 그 글은 오웰식 정치적 파괴력을 갖고 있다. 조작된 신화의 위력은 끈질기다. 미국 대통령 시절 존 F. 케네디의 통찰은 유효하다. “진실의 가장 큰 적(敵)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거짓이 아니라, 그럴듯하고 비현실적인 신화다”(1962년 예일대학 연설).

자서전의 충동은 본능적이다. 거기에 따르는 비판이 있다. 집필자 시각으로 과거를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이회창 회고록』이 나왔다. 그는 전 한나라당 총재다. 그는 “뒷날의 공평한 역사 평가를 위해서도 야당의 역사를 제대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회고록을 쓰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의 출판은 적절했다. 글을 써서 알려야 한다. 역사의 신(神)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축적된 기록으로 재평가할 뿐이다. 기록이 부실하면 역사에서 소외된다. 왜곡과 축소의 대상이 된다.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된다. 정치의 본질은 역사투쟁이다. 적폐청산은 집단 기억의 정치화다.

한국 사회의 쏠림은 심하다. 그 현상은 영화에서도 실감 난다. 원로 영화인 신성일은 이렇게 지적했다. “요즘 한국 영화는 한쪽에 치우쳐 있다. 사람 죽이고, 분노하고, 사회를 비판하고, 잔인한 복수만 한다”(10월 부산국제영화제). 소설가 헤밍웨이는 “산문은 건축이지 실내장식이 아니다”(『오후의 죽음』)고 했다. 글은 감정을 꾸미는 데 허비해선 안 된다. 집짓기는 균형의 미학을 중시한다. 그런 글들은 쏠림과 편향을 바로잡는다. 그런 자세는 가짜뉴스를 퇴출시킨다. 그런 글쓰기는 루터식 변혁의 용기와 투지를 담는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