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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권력은 어떻게 파산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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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

“당신은 어떻게 파산했소.”- “두 개의 방식으로…서서히, 그러다가 갑자기(gradually, then suddenly).”(어니스트 헤밍웨이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서서히, 그러다가 갑자기” #최경환의 ‘억울함 소명’은 비겁 #배신 언어로 친박 자진소멸 #홍준표가 말한 ‘좌파 광풍’에 #‘친홍 김성태’는 열성 조연경력 #한국당 정체성은 혼란 속으로

파산의 과정은 두 단계다. 헤밍웨이의 소설 속 통찰은 정밀하다. 축적과 급전직하(急轉直下)다. 권력 파산도 마찬가지다. 정권의 부패와 오만이 서서히 쌓인다. 대중의 분노와 불만은 조금씩 축적된다. 권력의 무능과 나태는 그 흐름을 무시한다. 어느 순간 작은 사건에도 권력은 비틀거린다. 결정타를 맞으면 파국이다. 1년 전 박근혜 권력의 파산이 그랬다. 권력 파산은 언어의 파탄으로 잔존한다.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의 말은 실감 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사에 성실히 임해서 저의 억울함을 소명하겠다.”(6일 검찰 포토라인) 준비된 구절일 것이다. 그는 국정원 특수활동비 1억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자신의 구속 문제에 초연할 사람은 드물다. 실정법상 유무죄의 다툼은 당연하다. 최경환의 말은 간결했다. 선명하기보다 구차하다. 그 짧은 말에 유약과 비겁함이 스며 있다. 그는 친박의 간판이다. 그는 친박 감별사였다. 지난번 총선 때 그는 거들먹거렸다. 그의 어설픈 으스댐은 권력 몰락의 전조였다. 그에겐 시대적 과오가 있다. 친박은 보수를 허접하게 만들었다. 친박의 무모한 독주는 정권을 망가뜨렸다. 하지만 그의 언어에서 자책과 자성을 찾을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판을 거부한다. 그 이유로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을 들었다. 박근혜식 옥중투쟁은 계속된다. 그런 상황에서 ‘억울함 소명’은 비굴하다. 자기만 살겠다는 초라한 방어다. 그것은 새 체제에 순응해 용서를 비는 말이다. 친박의 간판은 교묘히 배신했다. 언어는 집단의 수준·정서를 드러낸다. 그의 어휘 선택은 친박의 용기 부족과 졸렬함을 압축한다. 그것으로 친박의 존재 가치는 소멸됐다. 그것은 박근혜의 업보다. 그런 인물을 중용한 비극적 대가다.

친박의 퇴조는 이어진다. 12일 한국당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패배했다. 홍준표 당 대표가 밀었던 김성태 의원이 뽑혔다. 홍준표는 “이제 친박계는 없다. 제대로 된 야당이 되자”고 했다. 김성태도 “문재인 정권의 독단과 전횡을 막겠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특위’ 위원장이다. 청문회 중계 덕분에 그는 대중에 알려졌다. 홍준표는 “국민들 요구는 좌파 광풍 시대를 멈춰 달라는 것”이라고 했다.

박보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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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광풍 시대의 종지부’-. 그것은 홍준표가 내건 투쟁 깃발이다. ‘광풍’ 제조에 비박도 나섰다. 김성태는 열성적인 조연자였다. 청문회에서 김성태의 위세는 보수의 쇠락을 앞당겼다. 김성태의 탄핵 찬성파는 바른정당으로 갔다. 탈당파 상당수가 복당했다. 복당파들은 진짜 보수를 세우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행각은 경망스럽고 난삽하다.

홍준표는 ‘친홍의 위력’을 과시했다. 그기세만큼 역설이 작동한다. 그것은 한국당 정체성의 혼선이다. 김성태의 등장은 보수의 향방과 이미지에 혼란을 준다. 김성태는 과거 행적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았다. 대중의 망각에 의존해 슬며시 경력을 세탁했다. 그리고 귀환했다.

홍준표는 ‘당내 통합’을 강조한다. 김성태는 자칭 투사다. 하지만 야당의 생명은 정체성이다. 정책의 실사구시 효과는 제한적이다. 국회에서 강경 투쟁도 한계를 갖는다. 정체성이 모호하면 대중 동원력의 재생은 힘들다. 위기관리 역량이 떨어진다. 김성태의 존재는 끊임없이 정체성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홍준표식 ‘좌파 광풍’ 차단의 전망도 불투명하다.

김성태는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외연 확장 의욕은 그의 경력답다. 그는 한국노총 사무총장 출신이다. 하지만 그 분야는 다른 정당들이 선점했다. 보수층의 우선적 기대와 수단이 다르다. 보수의 바람은 강성 노조 활동의 제한, 법인세 감면, 기업가 의욕 회복, 법치 강화다. 기업가 정신의 회복은 민생의 활기로 이어진다. 김성태가 그런 어젠다에 앞장설지 미지수다.

홍 대표의 정치판 출발은 저격수다. 저격수 말투는 단발성 직설이다. 상대방에게 자극과 모욕, 상처를 줘야 한다. 그는 막말 시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당 대표의 언어는 함축과 울림으로 가동해야 한다.

한국당에는 헤밍웨이식 파탄의 후유증이 깔려 있다. 거기서 벗어나려면 정체성을 단련해야 한다. 그것이 홍·김 대표의 긴급 과제다. 홍준표는 “신보수주의 정당”을 외친다. 그는 신보수의 세밀한 윤곽과 로드맵을 내놓아야 한다. 정당 재구성의 드라마는 말로 시작한다. 정제된 말들은 신보수의 감수성을 퍼뜨린다.

박보균 칼럼니스트·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