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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음악계의 '무서운 신인'…국제 대회 우승자 2인

중앙일보

입력

올해 클래식 음악계에서 떠오른 루키 두 명이 있다.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최재혁(23·작곡)과 ARD 국제 콩쿠르 우승자 손정범(26·피아노)이다. 2017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며 국제 무대에서 먼저 경력을 시작한 두 음악가를 소개한다. 나이는 많지 않지만 음악적 확신은 이미 뚜렷한 신인들이다.

작곡가 최재혁, 피아니스트 손정범 #"익숙한 아름다움 깨고 싶다" "안되는 게 없어서 오히려 고민이었다" #올해 유럽에서 국제 콩쿠르 승전보 보낸 2인 인터뷰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익숙한 아름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 마디를 쓰는 데 4시간이 걸린다"는 작곡가 최재혁.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 마디를 쓰는 데 4시간이 걸린다"는 작곡가 최재혁.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 콩쿠르 결선. 심사위원장인 작곡가 마티어스 핀처가 1위 수상작에 대한 평가를 발표했다. “감각적으로 음의 색채감을 살려냈으며 에너지를 보여주는 방식이 훌륭하다.” 찬사를 들으며 이 콩쿠르의 우승을 거머쥔 작품은 ‘클라리넷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녹턴 Ⅲ’. 최재혁의 곡이다.
78년 역사의 일류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최재혁은 “아주 평범하고 단순하게 음악을 해왔다”고 했다. 어려서는 네 살 위 누나가 잡고 있는 바이올린이 부러워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30분 수업이었는데 뒤에 15분은 딱지 치며 놀았고, 악기에 하얀 테이프를 붙여놓고 손가락만 움직이며 음계나 조성이 뭔지도 몰랐다.”
초등학교 때 동네의 학생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면서 생각이 한번 바뀌었다. “모차르트 같은 멜로디를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음악 공부를 시작했고 미국 월넛힐 예술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제서야 피아노를 처음 쳐봐서 도레도레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줄리아드 음악원 석사과정 중인 그는 어렵게 곡을 쓴다. 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15분짜리 곡을 5개월 동안 썼다. “한 마디 쓰는 데 4시간 걸린다”고 했다. 컴퓨터 프로그램 대신 펜과 자를 들고 종이에 직접 쓴다. “음 하나도 도(C)로 쓸지 도 샵(C#)으로 쓸지 하루종일 고민한다”고 했다.
모차르트처럼 쓰고 싶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모차르트 다음엔 이탈리아의 작곡가 살바토레 샤리노(70)였다. 2011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아카데미 과정에서 공부하면서 샤리노의 음악을 듣게 됐다. “구름에 붕 뜬 느낌의 음악이 좋아서 스타일을 본뜨기 시작했다”고 했다. 같은 해에 보스톤에서 연주된 진은숙(56)의 첼로 협주곡을 듣고 에너지에 충격을 받았다. “모차르트 스타일의 조성 음악 대신 현대의 작곡가들 스타일로 짧은 곡들을 계속해서 써보며 테크닉을 익혔다.”
환상적이고 조용한 작품을 만들던 최재혁은 제네바 콩쿠르에 소란스러운 야상곡을 써서 냈다. “사람들은 정적이고 평화로운 밤을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소란하고 못생긴 아름다움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클라리넷으로 낮은 음과 높은 음을 계속해서 오가도록 악보를 써서 밤의 ‘이상한 소리’를 표현했다.
이처럼 그는 “익숙한 것을 깨면서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넓혀가는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베토벤, 바그너, 스트라빈스키, 슈톡하우젠처럼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해 음악의 범위를 확장시킨 작곡가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고 했다. 내년 2월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새로운 작품을 내놓는다. 4월엔 스위스 제네바, 6월엔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을 위촉받아 클래식 음악의 본토를 무대로 활약할 예정이다.

"피아노로 어려운 게 없어서 고민이었다"

피아노로 말보다 더 정확하게 본인을 드러내는 것이 좋다는 손정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피아노로 말보다 더 정확하게 본인을 드러내는 것이 좋다는 손정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9월 ARD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손정범은 순도 높은 피아니스트다. “만 3세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지금까지 한 번도 피아니스트 말고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그는 “왜 피아노를 치는지 자문한 적도 없을 정도로 모든 시간을 피아노에만 쏟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착실하게 정석대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 재학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 입학, 이후 독일 뮌헨음대에서 공부했다. 같은 또래에선 ‘안되는 게 없는’ 학생으로 유명했다. 손가락 테크닉이 어렵기로 유명한 발라키예프의 ‘이슬라메이’를 중학교 시절부터 너끈히 연주했다. 화려하고 난해한 음악이 주특기였다. “모든 곡을 너무 쉽게 익히고 무대에서도 그게 드러나는 게 고민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남들은 고민해서 어렵게 연주하는 곡들을 너무 쉽게, 의미 부여를 적게 해서 연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른바 ‘연주 효과가 좋은’ 작품들을 주로 다루던 그는 한예종에 입학하면서 베토벤ㆍ브람스 같은 독일 음악의 매력을 알게 됐다. “이미 음악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던 선배들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음악의 깊이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이번 콩쿠르를 준비하면서도 베토벤 등 독일권 작곡가의 뉘앙스를 연구하는 데에 특별히 시간을 많이 썼다. “특히 ARD 콩쿠르는 독일 작곡가의 해석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다. 어린 시절에 화려하게만 연주하던 내가 이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이 사실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손정범은 또한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악기를 다루는 피아니스트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들었을 때 좋은 것’이다”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철학을 가지고 있어도 피아노를 잘 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 테크닉이 안 되는 곳은 되도록 만들고, 소리는 특별하게, 리듬은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했다.
이번 콩쿠르 우승으로 3년 동안 50번의 연주가 잡혀있다. 기존에 계획됐던 연주까지 더해서 지난 3개월 동안 전 세계 무대에 20번 올랐다. “몸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내 생각을 말보다 더 정확하게 음악으로 관객에게 전하는 희열이 엄청나다”고 했다. 내년에 손정범의 연주를 한국에서 볼 기회는 많다. 1월 11일엔 롯데콘서트홀에서 원코리아 유스 오케스트라의 창단 연주회에서 지휘자 정명훈과 베토벤 3번 협주곡을 연주한다. 2월엔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와 생상스를 협연하고 3월엔 독주회를 연다. 5월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도 독주회가 예정돼 있다. 국내외에서 연주 요청이 잇따르는 그는 “연주가 끊이지 않는 피아니스트”라는, 역시 ‘실용적이고 순도 높은’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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