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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세계는 조세전쟁 시대에 진입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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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

“우리나라가 정말 조세회피처인가요?” 이달 초 유럽연합(EU)의 조세 분야 비협조지역에 우리나라가 포함되자 사람들이 이같이 물어 왔다. 두 명칭을 동의어로 인식하게 된 이유가 중요하다. 먼저 EU가 공식 인터뷰에서 28개 전체 회원국이 통일된 명단을 만든 것은 역사상 최초라고 자랑하면서 문건에는 없는 조세회피처 블랙리스트라는 표현을 써 버렸다. 이는 실수라기보다 본심에 가깝다. 객관적 기준에서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

한국이 EU 조세회피처 포함되며 #무역·관세 이어 조세전쟁 막 올라 #공격적인 국제 조세 규범에 맞춰 #외투기업의 조세 감면 정비해야

명단에는 역외 탈세로 악명 높은 자치령 섬나라들이 다수 포함돼 있으니 말이다. 산업 기반이 전무해 유령 회사를 상대로 수수료 장사를 하거나 낙후된 경제 체제를 운영하는 국가들 사이에 1인당 3만 달러 소득을 목전에 둔 무역 규모 7위의 한국이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국제 참사였다. EU의 한국 망신 주기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올해 초 EU의 자체 조사 과정에서 우리의 외국인투자기업 세금 감면이 문제로 떠올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다. 제조업 분야는 실질적 기업 활동을 전제로 하니 기업에 대한 감면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EU도 이 기준을 받아들인다는 언급이 있었기에 조건을 충족하는 한국은 문제가 쉽게 정리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다. 애초부터 EU는 OECD보다 강화된 국제 조세 규범을 정해 놓고 있었다는 점을 놓쳤다. 투명성 위주의 OECD 국제 조세 규범에 더해 EU는 공정 조세 경쟁이라는 기준까지 요구한 것이다. 페이퍼 컴퍼니를 통한 역외 탈세만을 문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혜적 조세를 내세워 EU 국가의 세원을 잠식하는 행위는 모두 유해 세제로 간주해 고쳐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간과한 정부는 상세 해명 자료와 성의 있는 대응을 요구하는 EU 실무그룹에 OECD 기준만을 내세우다 불의의 일격을 맞았다. 유사한 제도가 있는 터키·베트남 등은 외교적 성의를 보여 명단에서 제외됐으나 우리는 자신의 힘과 지위를 과신하고 OECD 권위에 기대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만 반복하다 화를 자초했다.

시론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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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견 있는 국제사회의 누구도 한국을 대규모 역외 탈세 정보 문건으로 유명해진 파나마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같은 나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국제 조세 환경이 바뀌고 있다. 이번 사태의 중대한 교훈은 국제 조세 규범이 공격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투명성만 중시하던 OECD 국제 조세 규범에 EU가 공정 조세 경쟁을 추가함으로써 과거보다 엄격한 조건을 상대국에 요구하는 상황이 됐다.

국제사회는 이제 무역전쟁과 관세전쟁에 이어 조세전쟁(Tax War)의 시대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무역협정과 마찬가지로 자국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세제가 있으면 이의 조정을 상대국에 요구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첫 번째 파고를 우리가 제대로 맞았다는 것이 현 사태의 본질이다.

변화에는 준비가 필요한데도 기획재정부 세제실은 올 8월 국제조세협력과를 폐지하고 인력을 축소하는 우를 범했다. 그러한 조치가 이번 사태에 영향이 없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만 단순히 조직을 부활시키기보다 국제 조세 전문인력 확보에 노력을 집중하기를 권고하고 싶다.

세제도 손보아야 한다. 국책연구기관인 조세재정연구원이 분석한 대로 외국인투자기업에 대한 조세 감면은 실효성이 거의 없는 제도다. 2% 미만의 외국 기업만이 혜택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대다수 경제자유지역의 경우 감면 실적이 전무하다. 설문 조사에 따르면 국내 세무전문가들조차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답할 만큼 제도도 복잡하다. EU의 패널들이 불투명한 제도라 불평할 만하다.

핵심 문제는 동일 요건을 충족해도 외국 기업에만 차별적으로 특혜를 준다는 점이다. 굳이 EU가 이를 공식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어도 유해 조세 조항으로 국제적으로 금기시되는 구시대 유산을 정부는 일찌감치 정비했어야 했다. 제도의 개선 방안 마련에서 EU와의 감정적 갈등은 잠시 접어 두자. 우리 자신을 위해 제도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 초기나 외환위기 직후와 달리 지금은 국내 기업의 자본이 풍부한 상태이고 우리 기술도 상당 수준에 도달해 있기에 외국인투자기업에 대한 차별적 특혜는 없애는 것이 맞다. 현재의 감면제도 자체를 국내 기업에 모두 그대로 확대하는 방식보다 대상 업종과 지역을 과감하게 축소한 후 내·외국기업 차별을 없애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세수 감소를 우려하는 기획재정부 세제실과 산업 활성화를 바라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서로 타협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