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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1800만원 수제차 디자인한 폴 양, 학부 전공은 생물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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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소형SUV 코나 신차발표회에서 종이테이프를 차체 측면에 붙이면서 상어 지느러미 형상의 디자인을 설명하는 이상엽 현대차 상무(우)와 루크 동커볼케 전무. [문희철 기자]

소형SUV 코나 신차발표회에서 종이테이프를 차체 측면에 붙이면서 상어 지느러미 형상의 디자인을 설명하는 이상엽 현대차 상무(우)와 루크 동커볼케 전무. [문희철 기자]

지난 6월 경기도 고양시 현대모터스튜디오에서 열린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코나(KONA) 신차 발표회. 무대 중앙에 검은색 랩(wrap)을 씌운 차량 실물이 등장했다.
차량에 이어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른 이들은 디자이너들이었다. 루크 동커볼케 현대디자인센터장(전무)은 버튼을 조작해 코나 모형을 돌려가며 실루엣 디자인을 설명했다. 이상엽 현대디자인센터 스타일링담당(상무)는 종이테이프를 차체 측면에 붙이면서 상어 지느러미 형상의 디자인을 눈으로 보여줬다. 이들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뒤에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코나를 직접 몰고 등장했다.

현대차의 소형 SUV 코나 신차발표회. 오른쪽부터 현대차 정의선 부회장, 현대디자인센터장 루크 동커볼케 전무, 현대스타일링담당 이상엽 상무. [현대차]

현대차의 소형 SUV 코나 신차발표회. 오른쪽부터 현대차 정의선 부회장, 현대디자인센터장 루크 동커볼케 전무, 현대스타일링담당 이상엽 상무. [현대차]

코나는 현대차 글로벌 시장 공략의 선봉 역할을 맡은 중요한 차종이다. 이 차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가장 주목도 높은 시점에 ‘1번 타자’로 디자이너들이 등장한 것이다. 자동차 디자이너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본지는 이 자리에 등장한 이상엽(48) 상무와 최근 방한한 줄리안 톰슨(57) 재규어 선행 디자인 디렉터, 폴 양(42) 레블휠스 수석 디자이너를 릴레이 인터뷰했다.
이들에 따르면 자동차 디자이너는 크게 완성차 제조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와 외부에서 이들과 협업하는 독립 디자이너로 구분한다. 상대적으로 협업 능력이 뛰어나면 완성차에서, 자신만의 개성·창의력을 중시하면 독립 디자이너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완성차 디자이너 업무는 크게 ^외장 디자인 ^내장 디자인 ^선행 디자인으로 구분한다. 외장 디자이너는 차체 외관을, 내장 디자이너는 인테리어를 맡는다. 선행 디자이너는 미래 자동차 디자인 개발이 주업무다. 줄리안 톰슨 디렉터는 요즘 2022년~2030년 개발해서 2040년 시판할 재규어 차량을 디자인 중이다.

줄리안 톰슨 재규어 선행디자인 디렉터가 본지와 단독인터뷰에 응했다. [사진 재규어]

줄리안 톰슨 재규어 선행디자인 디렉터가 본지와 단독인터뷰에 응했다. [사진 재규어]

업무·소속은 다를 수 있지만 자동차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자격은 비슷하다. 우선 자동차에 대한 깊은 관심·애정은 필수다.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알릴 수 있는 능력도(3인 공통 답변)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다. 폴 양 수석디자이너는 “요즘엔 태블릿PC 등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는 비율이 늘었지만, 그리는 도구만 달라졌을 뿐 ‘소묘(drawing)’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프레젠테이션 능력도 중요하다. 비단 신차 발표회에 오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을 소비자나 엔지니어, 동료에게 열정적으로 ‘세일즈’하기 위해서다. 이 상무는 “좋은 디자이너는 좋은 디자인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를 듣는 이가 명확한 그림으로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경기도 화성 현대디자인센터 2층 집무실에서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한 이상엽 현대자동차그룹 현대디자인센터 스타일링담당 상무 [사진 현대차]

경기도 화성 현대디자인센터 2층 집무실에서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한 이상엽 현대자동차그룹 현대디자인센터 스타일링담당 상무 [사진 현대차]

이는 자동차 디자이너의 최고 덕목이 ‘팀워크’기 때문이다. 다른 업종에서는 성향이 다르고 취향이 독특한 사람이 모이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디자이너는 다르다. 오히려 모두 동일한 관점을 가진 디자이너만 모이면 정체한 디자인만 나온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개성 있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팀워크는 필수다. 현대디자인센터 3인방(피터 슈라이어 현대차그룹 디자인총괄(사장)·루크 동커볼케 전무·이상엽 상무)은 아예 한 사무실에서 책상을 같이 쓴다. 회사에서 개인 집무실을 제공하려 했지만 이들이 거절했다. 팀워크 때문이다.

엔지니어·마케터·경영자 등 이종 직종과 팀워크도 중요하다. 차량은 디자인과 성능, 마케팅이 결합한 종합 상품이기 때문이다. 줄리안 톰슨 디렉터에 따르면, 재규어 최대주주인 타타그룹의 라탄 타타 명예회장은 이안 칼럼 재규어 디자인팀과 정기적으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는 게 ‘취미’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도 마찬가지다. 이상엽 상무는 “현대차그룹이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인센터를 갖춘 배경은 디자인 가치를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디자이너와 소통한 정 부회장의 오너십”이라고 설명했다.

본지와 인터뷰한 폴 양 레블휠스 수석디자이너. [문희철 기자]

본지와 인터뷰한 폴 양 레블휠스 수석디자이너. [문희철 기자]

요즘 속칭 ‘잘 나가는’ 스타 디자이너는 대부분 2개의 디자인 대학 중 한 곳을 졸업했다. 하나는 제너럴모터스(GM) 지원으로 세계 최초(1948년) 운송디자인전공 과정을 운영하는 미국 아트센터디자인대(Art Center College of Design)다. 또 하나는 1971년부터 차량디자인대학원과정을 운영 중인 영국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다.
줄리안 톰슨 디렉터는 “내가 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한 1984년엔 전 세계에서 배출하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20여명에 불과할 정도로 소규모 커뮤니티였다”고 기억했다. 때문에 유명한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친분이 있다고 한다. 예컨대 줄리안 톰슨의 직속상사인 이안 칼럼 재규어 디자인디렉터(1982년 졸업)와 피터 슈라이어 사장(1983년 졸업)은 영국왕립예술학교 시절부터 가까웠다. 이상엽 상무와 폴 양 수석디자이너도 아트센터디자인대 재학 시절 동고동락하며 수학했다. 12월 초 줄리안 톰슨이 방한하자 가장 먼저 환영 문자를 보낸 사람은 루크 동커볼케 전무였다.
이들이 디자인만 공부한 건 아니다. 스타 디자이너는 이른바 ‘부전공’이 하나씩 더 있다. 줄리안 톰슨 디자이너는 학부에서는 공학을 전공했다. 이상엽 상무는 홍익대 미대 출신이며, 폴 양 수석디자이너는 미국 UCLA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다 건너왔다.
전공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에게는 중요한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성실성이다. 폴 양 수석디자이너는 “아트센터디자인대 재학 시절 이상엽 상무는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며 “(통상 디자이너가 성실함이 부족할 수 있는데) 일부 동기들이 이 상무를 약간 질투할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한국 디자이너 지망생들과 대화 중인 줄리안 톰슨 재규어 선행디자인 디렉터. [사진 재규어]

한국 디자이너 지망생들과 대화 중인 줄리안 톰슨 재규어 선행디자인 디렉터. [사진 재규어]

한때 한국 자동차 디자인은 웃음거리였다. GM에 장기간 근무했던 이상엽 상무는 “90년대만 해도 미국인은 우스꽝스러운 자동차 디자인을 ‘한국차(korean car)’라고 불렀다”고 했다. 하지만 YF쏘나타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이 상무는 “요즘엔 GM이 디자인 품평회를 열면 반드시 현대차가 등장한다”고 전했다. 디자인 측면에서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가 현대차를 경쟁업체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엔 현대차 디자인이 일본차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자동차 디자이너는 “도시락 모양에서 벗어난 일본차가 요즘엔 정체성 혼란을 겪는데 비해, 한국차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디자인을 개선했다”며 사견을 전제로 “디자인은 독일차 > 제네시스 > 마쯔다 > 도요타 > 현대기아차 > 혼다 > 닛산 > 스바루 > 미쓰비시 순”이라고 평가했다. ‘디자인 경영’을 선언한 정의선 부회장 전략이 통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폴 양 레블휠스 수석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드림크래프트. [폴 양 제공]

폴 양 레블휠스 수석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드림크래프트. [폴 양 제공]

주목할만한 사례도 있다. 한국인 2세인 폴 양 수석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수제 이륜차는 1대당 무려 20만달러(2억1800만원)에 팔렸다. 이 차량은 엔진·트랜스미션을 제외하면 디자인부터 설계, 제조 과정이 모두 폴 양 디자이너의 손을 거쳤다. 그는 “유럽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1920년대 미국 디자인을 한국인의 시각으로 오마주해 클래식하면서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재탄생시켰다”고 설명했다(사진 3 참조).

폴 양 수석디자이너가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수제차에 앉아 있다. 이 차는 1대가 무려 20만달러(2억1800만원)에 팔렸다. [폴 양 제공]

폴 양 수석디자이너가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수제차에 앉아 있다. 이 차는 1대가 무려 20만달러(2억1800만원)에 팔렸다. [폴 양 제공]

최근 현대차가 출시한 중형 세단 G70에 대해서도 그는 “탄력 있고 탱탱한 근육질 운동선수를 연상시키는 역동성과 우아함을 갖춘 디자인”이라며 “제네시스 만의 디자인 전통·역사를 쌓아간다면 언젠가 현대차 디자인도 최고급 명차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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