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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중립화장실’ 설치되나…“성범죄 자극” 우려도

중앙일보

입력

‘남자 화장실로 갈까? 아니면 여자 화장실?’

성별 구분 없는 1인 화장실 설치 #서울시 인권정책기본계획에 담겨 #강남역 사건·몰카 범죄 우려 목소리 #성전환자와 장애인 등 인권 문제도

화장실 앞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성 소수자들에겐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성전환 수술을 받았거나 성 정체성과 생물학적 성별이 다른 이들은 남녀로 나뉜 화장실 앞에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미국 일부 주에서 사용 중인 성중립 화장실 표지판. [사진 중앙포토]

미국 일부 주에서 사용 중인 성중립 화장실 표지판. [사진 중앙포토]

서울시가 인권 정책에 이 문제를 포함시켰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 시범 운영 계획안이다. 그 동안 일부 기업과 시민단체, 대학 등에서 성별 구분 없는 화장실을 설치하곤 했지만 공공 기관이 이 문제를 놓고 공식 논의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인권재단사람 사무실 1층에 설치된 성중립 화장실 표지판의 모습. [사진 인권재단사람]

인권재단사람 사무실 1층에 설치된 성중립 화장실 표지판의 모습. [사진 인권재단사람]

지난달 29일 공청회에서 서울시는 ‘제2차 인권정책 기본계획’ 초안을 공개했다. 서울시는 이 초안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성소수자와 임산부, 장애인, 가족의 공공 화장실 이용을 위한 것이며 설치 장소로는 구청·시청 등 공공기관과 국공립 대학 시설, 지하철역 등을 제안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서울시가 제안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영미권에서는 주로 ‘All gender restroom(성중립화장실)’으로 불린다. 화장실 하나에 세면대와 용변기가 모두 배치된 형태다. 한국의 공공시설에 주로 설치된 장애인 화장실과 비슷하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 장애인과 활동보조인, 성소수자 등이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서울시청 1층에 있는 '가족도우미화장실'의 모습. 화장실 이용시 동행자가 필요한 장애인과 노약자 등을 위한 공간으로, 소수자를 배려한다는 점에서 성중립화장실과 맥락을 같이 한다. 독립된 공간에 장애인용 손잡이, 양변기, 세면대 등이 모두 들어가 있다. 홍지유 기자

서울시청 1층에 있는 '가족도우미화장실'의 모습. 화장실 이용시 동행자가 필요한 장애인과 노약자 등을 위한 공간으로, 소수자를 배려한다는 점에서 성중립화장실과 맥락을 같이 한다. 독립된 공간에 장애인용 손잡이, 양변기, 세면대 등이 모두 들어가 있다. 홍지유 기자

성중립 화장실은 ‘남녀 공용화장실’과는 다른 개념이다. 2016년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의 현장인 남녀 공용화장실은 한 화장실에 남성용 소변기와 양변기가 모두 들어 있어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남녀가 동시에 용변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성중립 화장실은 화장실마다 독립된 잠금장치가 있고 세면대와 양변기가 모두 한 칸에 놓여있다. 화장실 안에서 생면부지의 이성과 조우를 하게 될 우려는 없다.

서울시청 '가족도우미화장실'의 표지판. 홍지유 기자

서울시청 '가족도우미화장실'의 표지판. 홍지유 기자

성중립 화장실은 영미권에서도 약 7년 전에 필요성이 공론화됐다. 201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남자 화장실에서 트렌스젠더 학생(여성성을 지닌 생물학적 남성)이 폭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다.

성 소수자가 화장실에서 겪을 수 있는 폭력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확산됐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여성적인 외모를 가졌거나,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들이 특정 성별로 구분된 화장실을 이용할 때는 언어폭력이나 성폭력에 노출된다는 지적이었다. 영미권을 중심으로 논란이 확산된 이후 2015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성중립 화장실을 설치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올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업무용 빌딩과 공공기관 건물을 포함한 모든 1인용 공공화장실에 ‘성 중립’ 표지판을 의무적으로 달게 했다.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에 대비해 성중립 화장실을 설치할 방침이다.

한국다양성연구소에 설치된 성중립 화장실 표지판. '이 화장실은 이분법적 성별 구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문구가 쓰여있다. [사진 한국다양성연구소]

한국다양성연구소에 설치된 성중립 화장실 표지판. '이 화장실은 이분법적 성별 구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문구가 쓰여있다. [사진 한국다양성연구소]

해외와 달리 아직까지 국내에선 ‘성중립 화장실’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화장실 남녀 분리 요구가 더 강해졌다. 내년 하반기부터는 2000㎡가 넘는 근린생활시설에 남녀 화장실을 의무적으로 분리하도록 하는 법이 시행된다.

서울시의 인권정책 기본계획에도 “공중화장실법이 남녀 분리를 의무 규정으로 하고 있어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실정법 위반이 될 수 있으므로 법 개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대해 박봉규 서울시 환경보건팀장은 “아직 아이디어를 검토하는 단계”라며 “설치 장소와 규모는 정해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일본 백화점에 설치된 '모두의 화장실(민나노토이레)' 표지판.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 아이를 동반한 부모 등 모두를 위한 다목적 공간이라는 설명이 쓰여있다. [사진 한국다양성연구소]

일본 백화점에 설치된 '모두의 화장실(민나노토이레)' 표지판.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 아이를 동반한 부모 등 모두를 위한 다목적 공간이라는 설명이 쓰여있다. [사진 한국다양성연구소]

성중립 화장실 논의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직장인 이윤아(26)씨는 “여성 전용 화장실을 쓰면서도 몰카 범죄를 두려워하는데, 성별 구분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게 되면 불안감이 커질 것 같다”고 말했다.

화장실 구조와 성범죄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범죄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실행 욕구를 증폭할 수는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지하철에서 몰카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피해자가 스스로 방어하기 어려운 상황이 범죄 의도를 자극하기 때문”이라며 “똑같이 몰카를 설치한다고 해도 여성만 있는 공간에 몰카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에 비해 발각 위험이 적다고 판단할 개연성이 높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시립대학교에서 사용하는 성중립화장실 표지판. 남녀 성별 표시 기호가 혼재된 형태다. [사진 뉴욕시립대 홈페이지]

미국 뉴욕시립대학교에서 사용하는 성중립화장실 표지판. 남녀 성별 표시 기호가 혼재된 형태다. [사진 뉴욕시립대 홈페이지]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윤해성 박사는 “화장실 구조만을 가지고 성범죄가 일어난다고 보긴 어렵지만, 남녀가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경우 좀 더 쉽게 범죄에 다가설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장은 “성소수자들은 공공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해 방광염 등으로 고통받기도 한다”며 “성별이 구분된 화장실을 모두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공공기관 만큼은 한 두칸의 성별없는 화장실을 추가로 만들어 성소수자뿐 아닌 이성 활동보조인이 필요한 장애인과 자식과 동행해야 하는 노부모 등이 모두 혜택을 보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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