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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유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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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우리의 20세기는 유교 망각의 역사다. 망국과 식민지의 굴욕감이 유교에 죄의 낙인을 찍고, 근대화의 요청이 실학에서 위안을 찾게 만들었다. 유교는 광장에 나서지 못하고, 나이든 할아버지들의 구석진 한숨 속에서 시들어갔다. 그러던 유교가 지난 세기말에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근대화의 성공이었다.

그동안 근대화의 장애물로 여겨지던 유교가 기실 근대화를 성공시킨 마인드라는 소리가 저쪽 태평양 건너편에서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가 그것이다. 유교의 집단주의적 성향, 교육열, 그리고 가족을 위한 희생 등등이 아시아의 후발 국가들을 신흥 강국으로 끌어올렸다는 소식에 칩거하고 있던 유교의 사람들이 일약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외환위기가 그 싹에 찬물을 끼얹어버렸다.

스토리는 계속된다. 기적같이 한국은 다시 일어섰고 그 자신감이 새로운 유교의 코드를 요청했다. 봄은 문화계로부터 왔다. 일본.중국.동남아를 넘어 태평양까지 진출했다는 한류의 뿌리에 유교가 거론되고 있다는 얘기는 벌써 했다. 조선의 왕과 신하, 그리고 광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거기 조선왕조실록 한 줄이 있었다고 한다. 옛적 선비들의 기벽과 비현실적 고집을 다룬 책이 장안의 지가를 흔들고 있다. 이 변모는 놀랍다. 그동안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당쟁과 왕실의 추악한 음모의 시선으로만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왕의 남자'와 '미쳐야 미친다'의 성공을 이념이나 변명을 접고 등장인물들 각자의 삶에 렌즈를 들이댄 데서 찾는다. 조선의 역사를, 그 유교의 정치와 문화를 식민지적 상흔을 넘어 있는 그대로 따뜻하게 바라보게 된 것, 이는 가위 혁명적 전환이다.

내가 좀 오버하는지도 모르겠다. 전통을, 그 핵심 코드인 유교를 정치가 아니라 문화와 콘텐트로 접근하는 시도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조선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의 의상 소품이 화려해지고 게임 등에서는 고전에서 걸어나온 화려한 캐릭터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흑백의 사진 속에 갇혀 있던 조선의 색동컬러가 골목 사이와 인터넷 페이지들에서 우르르 피어나는 것을 보라. 경제 규모가 커지고 지구화가 진전되는 것만큼 로컬한 문화의 폭이 커지고, 유교의 코드 또한 활력을 띠어가게 될 것이다. 그런 만큼 전문가들이 유교를 접근하는 방식도 환골탈태, 크게 변해 주어야 한다.

새봄이 오는데도 정작 유교 진영이 너무 경직돼 있다. 과거의 영광에 연연해 새 기회를 놓치고 있어 안타깝다. 공맹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가부장제는 건드릴 수 없으며, 제사는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 유교는 아니다. 유교는 시대와 더불어 스스로 변모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고 새 역사를 써 왔다. 그 가운데는 사서삼경을 불사르고 제사조차 폐지하자는 유교도 있다. 경전과 제사 없어도 유교는 살아 있다.

새 개척지는 어디일까. 지금 적은 문화 콘텐트 외에 한류의 기반인 가족 가치, 그리고 조직 속에서의 관계 경영,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은 다른 지평을 볼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마저도 원론이고 원칙일 뿐, 실질의 코드는 현금의 구체성 위에서 새로 만들고 채워나가야 할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