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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말고 ‘함께' 하는 공부로 문제 해결력 쑥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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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협업 능력이 뜬다

OECD는 2015년부터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협업적 문제해결력’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사회에선 혼자 일을 하는 것보다 팀을 이뤄 시너지를 내는 게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죠. 최근 선진국 학교에선 협력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사의 일방적 수업으로 이뤄진 기존의 교육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죠. 이번 주 ‘열려라 공부’에선 협력 수업의 구체적인 방법과 효과를 면밀히 살펴봤습니다.

미래교육 모델로 뜨는 '협력 수업' #무학중 과학수업, 조별 과제 탐구 #"함께 토론하면 저절로 정답 나와" #체험형 학습, 하루 지나도 75% 기억 #저커버그 나온 고교 '원탁 수업' 유명

과학수업 시간에 조별로 모둠을 지어 토론식 수업을 하고 있는 서울 무학중 학생들과 손미현(왼쪽에서 두 번째) 교사. 강정현 기자

과학수업 시간에 조별로 모둠을 지어 토론식 수업을 하고 있는 서울 무학중 학생들과 손미현(왼쪽에서 두 번째) 교사. 강정현 기자

“이 문제는 지렛대를 사용하는 데 필요한 일의 양을 구하는 것 같은데.”

지난 4일 오후 서울 성동구 무학중학교 2학년 2반 과학수업 시간. 7조의 김창훈(14)군이 1조에서 낸 문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같은 조의 김민규(14)군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지레 위 물체의 무게와 이동거리를 곱해서 일의 양을 계산하는 문제야.” 두 친구의 말을 듣고 있던 조장 김지우(14)군이 입을 열었다. “그럼 너희 둘이 일의 양을 계산해줘. 나는 지레를 드는 데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따져서 지레가 얼마나 움직였는지 알아볼게.”

이 학교 손미현 교사의 과학수업 시간은 늘 시끌벅적하다. 20여 명의 학생은 7개 조로 나뉘어 모둠 수업을 하는데 교사보다 훨씬 더 말을 많이 한다. 45분 수업 중 손 교사가 말하는 시간은 대략 10~15분. 나머지는 학생들끼리 토론하고 탐구하는 시간이다. 이날 수업은 한 주 뒤의 기말고사에 대비해 학생들끼리 학습 내용을 복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각 조는 큰 전지에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범위의 수업 내용을 요약하고 이를 점검할 수 있는 문제를 3~4개씩 냈다. 학생들은 조별로 서로 다른 색깔의 사인펜을 들고 7개 조를 돌면서 함께 문제를 풀었다. 개념이 잘못됐거나 문제가 틀린 경우엔 사인펜으로 수정하며 보완해줬다.

2조의 배규호(14)군은 7조가 낸 문제에서 잘못된 점을 고쳐줬다. 도르래를 사용해 물체를 들어 올릴 때 필요한 에너지의 양을 구하는 문제였다. “바른 문제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해요. 첫째는 도르래를 들어 올릴 때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려줘야 합니다. 둘째는 도르래의 무게를 계산에 포함할지 말지를 정해줘야 하죠.”

중력의 법칙을 이용해 학생들이 설계한 놀이동산의 놀이기구. 윤석만 기자

중력의 법칙을 이용해 학생들이 설계한 놀이동산의 놀이기구. 윤석만 기자

 평소에도 손 교사의 수업시간은 조별 활동으로 이뤄진다. 실생활과 접목한 재미있는 소재로 탐구 과제를 정해주면 학생들끼리 토론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지난 10월엔 빛의 3원색을 공부하면서 각 조원이 탐정이 돼 범인을 잡는 게임을 했다.

목격자마다 범인이 입은 외투의 색을 다르게 증언했는데, 이런 내용을 토대로 실제 옷 색깔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었다. 손 교사는 “빛의 합성과 반사의 원리를 적용해야 풀 수 있는 문제”라며 “혼자선 어려워도 함께 토론하다 보면 저절로 정답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빛의 3원색을 이용해 범인이 입고 있던 옷의 색깔을 맞추는 문제. 과학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토론을 통해 임 문제를 함께 풀었다. 윤석만 기자

빛의 3원색을 이용해 범인이 입고 있던 옷의 색깔을 맞추는 문제. 과학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토론을 통해 임 문제를 함께 풀었다. 윤석만 기자

손 교사는 지난 2013년 모둠별 협력수업을 도입했다. 그는 “같이 토론하고 궁리하면서 협동의 중요성을 학생 스스로 깨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또 “일방적 수업을 할 때보다 스스로 문제를 탐구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향상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학습 후 24시간 뒤 기억에 남는 효과

학습 후 24시간 뒤 기억에 남는 효과

협력 수업을 하면 의사소통능력도 길러진다. 김창훈군은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김민규군은 “수업 때마다 친구들과 토론을 하면서 내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게 더욱 쉬워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함께 하는 공부, 이른바 '협력 수업'이 미래의 교육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읽기·수학·과학 지식을 주로 보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학업성취도 평가에서도 ‘협력적 문제해결력’을 2015년부터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주호(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서로 더욱 많이 의존하게 되고 연결성도 강해지기 때문에 여럿이 팀을 이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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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머피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는 “케네디와 클린턴·오바마 같은 리더들은 학창시절부터 활발한 토론을 하며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훈련을 해왔다”며 “대학·기업 등 어느 조직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디베이트 가이드』).

협력 수업은 학습효과도 높다. 미국 행동과학연구소의 학습 피라미드 모형에 따르면 학습 후 24시간 뒤 기억에 남는 비율이 일방적 수업에선 5%에 불과하다. 하지만 참여형 학습에선 기억에 남는 비율이 훨씬 높아 토론 수업은 50%, 체험·실습 수업은 75%에 이른다. 지은림 경희대 연구처장(교육학)은 “협력 수업에선 토론과 체험 등 다양한 학습법이 사용되기 때문에 학습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고 말했다.

필립스 액시터 아카데미는 고교의 하버드로 불리는 명문 학교다. [중앙포토]

필립스 액시터 아카데미는 고교의 하버드로 불리는 명문 학교다. [중앙포토]

선진국에선 이미 협력 수업을 핵심 수업 모델로 적용하고 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졸업한 고교인 미국 필립스 액시터 아카데미가 대표적이다. 졸업생 중 30%가 아이비리그(Ivy League·미국 동부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명문 고교다. 이 학교엔 교실마다 큰 원탁이 있다. 15명 내외의 학생들이 이 원탁에 둘러앉아 토론식으로 수업한다. 원탁 기부자의 이름을 따 ‘하크니스 테이블’이라 부른다.

학생들은 일방적으로 강의를 듣는 게 아니라 팀별 과제 발표와 토론을 통해 스스로 학습한다. 수업에선 협력이 제일 중시된다. 공부는 ‘남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나누는 것’이라고 이 학교에선 강조한다. 교사들은 원활한 토론이 이뤄질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할 뿐이다.

이 학교 입학사정관을 지낸 최유진 미국 노스파크대 교수는 “액시터에선 서로 협력하고 존중하는 공부 방식을 통해 성실성·책임감·배려심 같은 인성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고 말했다. 학생평가 때도 시험점수만이 아니라 토론 준비와 태도,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필립스 액시터 아카데미의 하크니스 테이블에서 토론을 하고 있는 학생들. [중앙포토]

필립스 액시터 아카데미의 하크니스 테이블에서 토론을 하고 있는 학생들. [중앙포토]

기업들도 협동하는 능력을 중시하는 분위기다. 구글과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들은 ‘팀워크’를 인재 선발의 필수 기준으로 강조하고 있다. 구글 인사담당 사장 라즐로 복은 자신의 책 『일하는 원칙(work rules)』에서 “머리가 좋거나 스펙이 뛰어난 사람보다는 문제 해결을 위해 협업할 수 있고 지적으로도 겸손한 사람을 원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최초로 구글 본사에 취업한 이준영 구글 엔지니어링 매니저 역시 “아무리 똑똑해도 팀워크에 문제가 있으면 채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글은 전 세계에서 입사지원자가 3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0.2%만 채용되는데 이때 핵심 선발 기준이 ‘협업능력’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다보스포럼은 미래 핵심역량 5가지를 꼽았는데 그중 하나가 ‘협업능력’이었다. 나머지는 문제해결 능력,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사람관리 역량 등이었다.

국내 기업 인사 담당자들도 협업능력을 중시하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해 12월 500대 기업 인사 담당자들을 조사했다. 그 결과, 채용 때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로 도덕성·인성(23.5%)이 꼽혔다.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협업능력과 문제해결력(각각 13.6%)이었다. 이어 인내력(13.3%)과 의사소통능력(10.4%) 등이 뒤를 이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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