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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차 커플 그린 '초행'...세계 영화제가 주목한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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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꼭 해야 하나요? 

두사람이 만나 연애하는 것을 넘어서 결혼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돌파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7일 개봉한 영화 '초행의 한 장면'. [사진 인디플러그]

두사람이 만나 연애하는 것을 넘어서 결혼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돌파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7일 개봉한 영화 '초행의 한 장면'. [사진 인디플러그]

 '미묘하고 정서가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절제된 연출로 보편적 울림을 전하는, 단단한 영화"(제70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견고하고 섬세한 각본은 사회 이슈를 집요하게 건드리고 있다. 제32회 마르델 플라타 국제영화제)

7년째 연애를 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영화 한 편이 어떻게 세계 영화제의 극찬을 끌어냈을까?
영화 '초행'(12월 7일 개봉, 김대환 감독,봄내필름 제작)이 불러일으킨 궁금증이었다. '초행'은 국내 개봉에 앞서 지난 8월 열린 제70회 스위스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 ‘베스트 이머징 디렉터상’을 수상했다. 가장 촉망받는 감독에게 주는 상이다. 이어 11월 말에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제32회 마르델 플라타 국제영화제 국제 경쟁 부문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받았다. 마르델 플라타 영화제는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지만, 남미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영화제다. 영화 '초행'에서 관객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동거 중인 커플이 양가 가족 만나러 가는 여정 그려 #불확실한 미래, 익숙하고 불편한 가족...이들에겐 '결혼'이 무겁다 #20~30 세대의 불안과 고민, 팽팽한 긴장감 살린 다큐 같은 극영화

인천과 삼척, 서로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  

인천에 사는 지영 부모님의 집을 함께 찾은 지영과 수현.부모님과의 식사 자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사진 인디플러그]

인천에 사는 지영 부모님의 집을 함께 찾은 지영과 수현.부모님과의 식사 자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사진 인디플러그]

 '초행'은 멜로 영화도 아니고, 그 흔한 로맨틱 코미디와도 거리가 멀다. 대단히 극적이랄 만한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놀라운 건 이 영화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커플이 함께하는 여정을 덤덤하게,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 '여정'은 다름 아닌 두 남녀 주인공이 각각 인천과 삼척에 사는 서로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경험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가족과의 익숙하고도 불편한 관계에서 빚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현시대의 20~30세대가 마주한 '오늘'을 담담하고도 서늘하게 그려낸다.

불확실한 미래, 더 불확실한 결혼. 이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고민이다. [사진 인디플러그]

불확실한 미래, 더 불확실한 결혼. 이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고민이다. [사진 인디플러그]

 각각 방송사 계약직, 미술학원 강사로 일하는 지영(김새벽)과 수현(조현철)은 7년차 커플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부모를 만나 인사를 드리기로 하고 함께 인천과 속초로 차례로 향한다. 지영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관계를 탐탁치 않아 하고 언젠가는 딸이 남자친구와 헤어져 집에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삼척에 사는 수현의 부모는 별거 중이다. 칠순을 맞아 모처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지만 수현의 아버지는 난폭한 주사를 부린다.

영화 '초행'의 지영(김새벽).

영화 '초행'의 지영(김새벽).

 길은 있는 듯 없는 듯 

양가를 다녀온 이들은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영화는 이 이야기를 끝까지 팽팽한 호흡으로 이끌고 간다. 각자의 본가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 무심한 듯 아닌 듯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순간은 극도로 불안하고, 아슬아슬하다. 소형차를 타고 지영과 수현이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도 지지부진하고 막막해 보이기 짝이 없다.

김대환 감독. 영화 '초행'은 '철원기행'에 이은 그의 두번째 장편영화다.

김대환 감독. 영화 '초행'은 '철원기행'에 이은 그의 두번째 장편영화다.

극본을 직접 쓰고 연출한 김대환(32) 감독은 영화 '초행'에 자신의 경험을 녹였다. '초행'은 '철원기행'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연애 7년차였을 때 시나리오를 썼다. 그가 천착한 것은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었다고.  "지금 시대, 우리 세대가 같이 겪고 있는 불안의 감정을 담아보고 싶었다"는 그는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뭐니뭐니해도 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 일상의 디테일, 그 자체다.

봉준호 감독 "한국적 디테일로 충만한 영화"  

 8일 밤 서울 인디스페이스 상영관에서 김대환 감독과 함께하는 GV에 참석한 봉준호 감독은 '초행'을 가리켜 "섬세하고 한국적 디테일로 충만한 영화"라고 평했다. "칼부림이나 주먹다짐이 하나 없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하는, 긴장감이 팽팽한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배우 안성기는 '초행' 개봉을 앞두고 지난달 20일 열린 한 이벤트에 직접 참여해 "뚝심 있게 만든 영화"라며 "인물들의 연기가 사실적이어서 마치 영화 안의 공간에 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대환 감독 "일상의 영화적 순간 포착하고 싶었다"

김대환 감독은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적 연출에 대해 "현실에서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영화적인 것'은 충분하다. 사건을 엮고 일부러 영화적 장치를 만들어 양념을 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 커플이 처음으로 감행한 일상의 영화적 순간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싶었다"는 얘기다.

김새벽, 조철현 등 배우들에게 큰 설정만 주고 진솔한 연기를 끌어낸 것도 김 감독의 뚝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김 감독은 "시나리오에서 각 장면에 역할과 기능에 걸맞은 대사가 있었지만, 이를 거의 없애다시피 했다. 즉흥적으로 펼쳐지는 상황이 더 큰 장력으로 드라마를 끌고 나갔다"고 말했다.

'초행' 제작 현장의 김대환 감독과 배우들. '사진 인디플러그]

'초행' 제작 현장의 김대환 감독과 배우들. '사진 인디플러그]

 김대환 감독은 현재 세 번째 영화를 구상 중이다. 데뷔작인 '철원기행’(2016)은 평생을 철원의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한 아버지가 정년 퇴임하고 밥상머리에서 이혼하고 싶다고 선언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철원기행'과 '초행'에 이어 세번째 영화도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가 될 예정이다. 이른바 '가족영화 3부작'을 완결한다는 목표다. 우리가 가장 익숙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족 관계 안에서 가장 불안하고, 막막하고, 낯선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젊은 감독의 통찰이 다음 영화에선 또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된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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