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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엔 '죽음의 바다' 태안…명품 굴이 돌아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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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태안 기름유출 10년… 서해의 기적으로 돌아온 청정바다

지난 5일 오후 2시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 만조시간이 되면서 넓게 드러났던 갯벌이 서서히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굴 채취에 나섰던 마을 주민들도 하나둘 짐을 챙겨 뭍으로 올라왔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 10년을 이틀 앞둔 지난 5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서 김형수씨(오른쪽) 부부가 바다에서 채취한 굴을 까고 있다. 올해는 굴이 영글고 수확량도 많다고 한다. 신진호 기자

태안 기름유출 사고 10년을 이틀 앞둔 지난 5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서 김형수씨(오른쪽) 부부가 바다에서 채취한 굴을 까고 있다. 올해는 굴이 영글고 수확량도 많다고 한다. 신진호 기자

‘딸딸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경운기가 갯벌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비탈길로 올라왔다. 아주머니 3명이 탄 경운기 짐칸에는 채취한 굴이 실렸다. “많이 잡으셨어요?”라는 질문에 경운기를 몰던 아저씨는 “아주 좋아요”라고 환하게 웃었다.

2007년 12월 7일 삼성중공업 크레인-유조선 충돌로 검은재앙 몰려와 #생계 접고 방제작업 나선 주민, 123만 자원봉사자 노력에 기적 만들어 #기름으로 뒤덮였던 의항리… 굴 채취작업에 주민들 분주 10년전 회복 #잔존유징 2014년 기준 0% 기록, 멸종위기종 상괭이 무리지어 헤엄쳐

10여 분 뒤 검은색 가방을 메고 바구니를 든 아주머니가 숨을 헐떡이며 비탈길로 올라왔다. 오전 8시 갯벌에 나가 6시간 만에 돌아왔다는 아주머니는 “한 번 맛봐요”라며 바구니에서 굴을 꺼내 건넸다. 굴은 입에 넣었을 때 짭조름했지만 씹을수록 고소했다. 태안 앞바다에서 채취한 자연산 굴이었다.

지난 5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서 한 주민이 바닷가에서 채취한 자연산 굴. 신진호 기자

지난 5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서 한 주민이 바닷가에서 채취한 자연산 굴. 신진호 기자

아주머니는 “이게 의항꺼여. 다른 데 것하고는 달러~”라며 하나를 더 건넸다. 남은 굴을 더 까야 한다며 발길을 재촉한 아주머니는 “여기 바다가 깨끗하다는 걸 꼭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해안가 비닐하우스에선 김형수(77)·박희자(73·여)씨 부부가 굴을 까고 있었다. 이날 오전 갯벌에 나가 캐온 굴이다. 50여 년 전 결혼해 줄곧 이 마을에서 살았다는 부부는 “올해는 유독 굴이 영글고 맛도 좋다. 도매상들이 여기 굴을 사려고 줄을 섰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서 굴을 채취한 마을 주민들이 밀물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날 주민들은 "의항리 굴이 가장 맛있고 깨끗하니 마음 놓고 먹어 된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지난 5일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서 굴을 채취한 마을 주민들이 밀물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날 주민들은 "의항리 굴이 가장 맛있고 깨끗하니 마음 놓고 먹어 된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의항2리 마을에서 굴 채취가 이뤄진 건 불과 3~4년 전이다. 그 전엔 굴이 껍데기를 벌리고 죽거나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2007년 12월 태안에서 발생한 기름유출 사고 영향이었다. 자식들이 “읍내로 나와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주민들은 바다를 등질 수 없었다. 평생을 살았던 터전이기 때문이었다.

김씨 부부는 “기름 사고가 난 뒤 6~7년 동안 바다에서 굴은 보지도 못했다. 허연 바위만 있었다”며 “3년 전부터 조금씩 굴이 모양을 찾더니 올해는 기름 피해 이전보다 수확량도 훨씬 많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오후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주민들이 바다에서 굴을 채취한 뒤 경운기를 타고 뭍으로 올라 오고 있다. 주민들은 "올해가 유독 굴이 영글고 맛도 좋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지난 5일 오후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주민들이 바다에서 굴을 채취한 뒤 경운기를 타고 뭍으로 올라 오고 있다. 주민들은 "올해가 유독 굴이 영글고 맛도 좋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7일은 충남 태안에서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2007년 12월 7일 오전 7시6분. 충남 태안군 만리포해수욕장 앞바다에서 삼성중공업 해상크레인과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가 충돌했다. 사고로 유조선에 구멍이 나면서 1만2547㎘의 원유가 바다로 쏟아졌다. 푸른 바다가 순식간에 검은 재앙으로 변했다. 사상 최악의 해양오염 사고로 기록된 순간이었다.

원유는 조류를 타고 해안으로 흘러 태안을 비롯해 70㎞에 달하는 충남 서해안 6개 시·군 모래사장과 바위를 검게 뒤덮었다. 주민들은 시커먼 바다를 보고도 믿지 못했다. 전날까지 조개를 캐고 굴을 따던 멀쩡한 바다였기 때문이다.

12월 7일은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삼성중공업 해상 크레인과 유조선이 충돌해 검은 기름이 태안 앞바다를 뒤덮었다. 위 사진은 2007년 12월 검은 기름띠로 물든 태안 만리포해수욕장, 아래 사진은 10년이 지난 5일 오후 푸른 에메랄드 빛을 되찾은 만리포해수욕장의 모습. [연합뉴스]

12월 7일은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삼성중공업 해상 크레인과 유조선이 충돌해 검은 기름이 태안 앞바다를 뒤덮었다. 위 사진은 2007년 12월 검은 기름띠로 물든 태안 만리포해수욕장, 아래 사진은 10년이 지난 5일 오후 푸른 에메랄드 빛을 되찾은 만리포해수욕장의 모습. [연합뉴스]

하지만 태안 주민들은 강했다. 곧바로 장비를 챙겨 바다로 나갔다. 생계도 접고 기름과 사투를 벌였다. 국민도 힘을 보탰다. 사고 직후 전국에서 123만명의 자원봉사자가 사고 현장을 찾아 기름을 걷어냈다. 해안을 가득 메운 자원봉사자의 모습에 전 세계가 감동했다. 이런 노력으로 서해안은 빠르게 회복했고 청정 바다를 되찾았다. 국민은 이를 ‘서해의 기적’으로 불렀다.

◇사고 이전으로 회복한 청정 바다
기름 유출 사고 10년이 지나면서 태안은 놀랄 만큼 바르게 회복했다. 태안의 대표적 수산물인 꽃게와 대하, 우럭 등의 어획량이 예전 수준을 회복했다. 최근에는 난류성 어종인 오징어 어장이 형성되면서 태안이 새로운 오징어 산지로 변모했다.

10년 전인 지난 2007년 12월 9일. 태안 기름 유출사고 사흘째를 맞아 5000여 명의 인력이 태안 앞바다에서 방제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10년 전인 지난 2007년 12월 9일. 태안 기름 유출사고 사흘째를 맞아 5000여 명의 인력이 태안 앞바다에서 방제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가뭄 등의 영향으로 올봄 바지락 수확량이 작년보다 다소 줄었지만 연평균 생산량은 사고 이전보다 오히려 증가했다는 게 어민들이 설명이다. 지난 9~10월 태안 백사장 앞바다에서는 자연산 대하가 하루 평균 1~3t씩 잡히기도 했다.

기름 유출 사고 1년 뒤 열린 국제포럼에서 세계 각국의 환경 전문가들은 “사고로 인해 태안지역에 장기적으로 생태·환경파괴가 일어날 것”이라며 “수십 년이 걸려도 사고 이전으로 되돌리기 힘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들의 전망은 기우에 불과했다.

사고가 발생한 지 2년 뒤인 2009년 말 바지락 폐사율은 4.7%로 전년 24.6%에 비해 급감했다. 태안 연안 해수 유분농도도 전년의 절반으로 감소했다. “생태계 복원을 의미하는 청신호가 켜졌다”고 주민들은 반겼다.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사고로 원유가 해안가를 덮치면서 굴과 바지락, 전복양식장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 굴양식장에서 주민이 기름 범벅이 된 굴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기름 유출사고로 원유가 해안가를 덮치면서 굴과 바지락, 전복양식장이 피해를 입었다. 당시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 굴양식장에서 주민이 기름 범벅이 된 굴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6월에는 멸종 위기종인 상괭이 100여 마리가 태안 앞바다에서 무리 지어 헤엄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된 희귀종이자 태안 앞바다 등을 주 서식지로 하는 삿갓 모양의 ‘장수삿갓조개’도 기름유출 사고 3년 만인 2010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수삿갓조개는 수심 10m 깊이의 바위 등에 몸을 부착하고 살면서 미세조류를 주 먹이로 한다. 이후 태안에서 두 차례 더 발견됐다.

지난해 1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태안해안국립공원 보호지역 등급을 ‘카테고리Ⅴ’(경관보호지역)에서 ‘카테고리Ⅱ’(국립공원)로 상향 조정했다. IUCN은 세계 보호지역을 6개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경관보호지역에서 국립공원 등급으로 변경한 것은 태안 바다의 생태적 가치가 우수하고 관리·보전상태가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남 태안군의 모항항. 10년 전 기름유출 사고로 포구가 폐허로 변했지만 자원봉사자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청정해역으로 변했다. [사진 태안군]

충남 태안군의 모항항. 10년 전 기름유출 사고로 포구가 폐허로 변했지만 자원봉사자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청정해역으로 변했다. [사진 태안군]

해양 생태계를 나타내는 지표도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유류오염센터의 ‘허베이 스피리트호 유류 유출 사고에 따른 생태계 영향 장기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2008년 태안지역 전체 해안의 69.2%에 달하던 잔존 유징은 2014년 0%가 됐다. 잔존 유징은 기름이 해변이나 표면 아래로 스며든 정도를 뜻한다.

지난해 말 기준 동물성 플랑크톤 출현 종수는 사고 발생 직후보다 37% 포인트 증가했다. 다양도 지수도 계절별 변동 폭이 34% 포인트 감소했다. 계절별 변동 폭이 줄어든 것은 생태계 오염으로 감자기 출현했던 종이 사라지고 기존에 서식하던 종이 안정화됐다는 것을 말한다.

지난 5일 충남 태안 만리포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들이백사장을 걷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5일 충남 태안 만리포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들이백사장을 걷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백혈병 발병률 급증… 경제 활성화 등 남은 과제도 산적
지난 4일 충남연구원에서 기름 유출 사고 10주년을 맞아 앞으로의 대응 방향과 과제를 논의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그동안 해양생태복원과 수산자원의 생산성 복원, 관광 활성화, 피해배상 사정재판 마무리 등 지난 10년간의 성과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사고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과 지역주민의 건강, 지역경제 활성화 등 산적한 해결과제도 제시됐다.

충남 태안군은 기름유출 사고 이후 태안주민의 전립선암과 백혈병 발병률이 급증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암 발생률은 태안군이 전국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비슷한 성격의 다른 군(郡)과 비교할 때 전립선암(남성)과 백혈병(여성)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구름포해수욕장. 2007년 12월 기름유출 사고 당시 해변이 검게 변했지만 자원봉사자와 주민의 노력을 깨끗한 해변으로 변했다. 신진호 기자

충남 태안군 소원면 구름포해수욕장. 2007년 12월 기름유출 사고 당시 해변이 검게 변했지만 자원봉사자와 주민의 노력을 깨끗한 해변으로 변했다. 신진호 기자

전립선암 발병률은 2004년~2008년 10만명당 12.1명에서 사고 이후인 2009~2013년에는 30.7명으로 154%나 증가했다. 백혈병도 2004~2008년 10만명당 5.6명에서 2009~2013년에는 8.6명으로 54%나 높아졌다.

태안군 보건의료원 환경보건센터 박명숙 팀장은 “유류 유출 사고 이후 현재까지 지속해서 피해주민 건강 영향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이제는 기름 유출과 건강간 관계를 명확히 규정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충남도와 태안군은 바다가 예전 모습을 되찾았지만 주민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정확한 역학조사와 아직 끝나지 않은 보상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충남 태안 구름포해수욕장에 설치된 안내판. 2007년 기름유출 사고 당시에는 좁은 오솔길이 자원봉사자의 발길이 이어짐면서 큰 길로 변했고 현재는 '바닷길'로 조성돼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다. 신진호 기자

충남 태안 구름포해수욕장에 설치된 안내판. 2007년 기름유출 사고 당시에는 좁은 오솔길이 자원봉사자의 발길이 이어짐면서 큰 길로 변했고 현재는 '바닷길'로 조성돼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다. 신진호 기자

기름 유출에 따른 배·보상 소송의 경우 지난 10월 말 전국적으로 99.88%, 충남은 99.92%가 마무리된 상태다. 충남에서는 2심 5건, 3심 50건에 대한 소송이 진행 중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성태 박사는 “급변하는 관광 트렌드와 태안지역 특성을 고려해 해양레저스포츠를 활성화하고 낙조 관광 프로그램 등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며 “슬로시티 지정과 드라마·영화촬영 유치 등 정책 개발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태안=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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