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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기형도, 그의 시엔 청춘의 통과의례 다 담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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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경기도 광명의 기형도문학관에서 특별 대담을 가진 임우기 평론가(오른쪽)와 기형도문학관 팀장 김은석 평론가. 임씨는 기형도 유고집을 냈고, 김씨는 기형도 문학박사 1호다. [김춘식 기자]

경기도 광명의 기형도문학관에서 특별 대담을 가진 임우기 평론가(오른쪽)와 기형도문학관 팀장 김은석 평론가. 임씨는 기형도 유고집을 냈고, 김씨는 기형도 문학박사 1호다. [김춘식 기자]

생전 기형도(1960~89) 시인은 자기 시의 운명을 이렇게 점쳤었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본 것인가’.

임우기·김은석 문학평론가 대담 #어린 시절 엄마와 누이 걱정 #사회 초년병 불안까지 시에 농축 #지금도 여전히 그를 찾는 이유

자신의 삶과 문학을 독서와 책에 빗댄 작품, ‘흔해빠진 독서’와 ‘오래 된 書籍(서적)’에서다. 기형도는 틀렸다. 그의 문학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검은 페이지에 열광한다. 그의 1989년 유고시집이자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아직도 해마다 6000~8000부가 팔린다. 누적 판매 30만 부를 넘겼다. 그의 시는 소설·영화·연극에도 영감을 제공했다. 신경숙의 단편 ‘빈집’, 박찬옥 감독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 그렇게 탄생했다. 그가 살던 경기도 광명시에서 지난달 개관한 기형도문학관(www.kihyungdo.co.kr)은 말하자면 늦게 도착한 연서 같은 것이다. 시인이 세상을 뜬지 30년이 돼가는데도 식지 않는 ‘이상 열기 현상’의 반영이다.

요절한 천재. 그가 남긴 불멸의 예술. 이런 이미지는 대중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정작 살아남은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게 된다. 지난달 30일 문학관을 찾았다. 문학평론가 임우기(61)씨와 기형도문학관 김은석(47) 팀장을 만났다. 임씨는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기형도 유고집을 만들었던 편집자였다. 김 팀장은 기형도 박사 1호다. 두 사람에게 물었다. 기형도는 왜 인기인가. 영혼의 검은 페이지는 어떻게 읽나.

“쾌활하면서도 수줍음 많던 청년.” 임씨는 생전 기형도를 이렇게 기억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조용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노래를 곧잘 불렀다. 중앙고 중창단으로 활동한 이력 덕분이다. 인사가 깍듯해 한 번은 문학잡지에 우호적인 시평(詩評)을 썼더니 다음날 바로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했다.

지난달 문을 연 기형도문학관 . [사진 광명문화재단]

지난달 문을 연 기형도문학관 . [사진 광명문화재단]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은 임씨에게도 충격이었다. 원고는 이미 들어와 있던 상태. 한시라도 빨리 시집을 출간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 김현(1942~90)과 비극적인 청년 시인의 조합은 그 와중에 만들어졌다. 임씨는 “기형도 유고집 해설을 쓸 당시 김현의 필력은 절정이었다. 다가오는 병마(이듬해 사망)를 감지하던 시기였다”고 했다. “광휘로운 비평문이 붙은 운명적인 시집에 사람들의 눈이 멀 정도였다.”

김 팀장은 “89년 대학에 입학해 기형도 시집을 처음 접했을 때 뭔가 가슴을 쿵쿵 치면서도 위로를 건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마치 죽은 시인이 읽는 이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형도의 시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중앙대)한 김 팀장이 뒤늦게 문학으로 되돌아와 다시 접했을 때도 뭔가 치유받는 느낌을 선사했다. 청춘의 고민, 갓 사회에 진출한 초년병의 불안과 절망이 빠짐없이 들어있었다. ‘대학 시절’, 시인의 중앙일보 기자 시절이 배경인 듯한 ‘오후 4시의 희망’ 같은 작품이 그렇다.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짧지만 파란만장한 내 인생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김 팀장은 “대학 강의를 해보면 요즘 대학생들도 여전히 기형도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 엄마 걱정, 누이 걱정, 군대 체험 등 인생 한 편이 농축된 느낌이어서 더욱 사랑받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검은 페이지로 가득한 시인의 영혼에 어떤 독법을 적용할 수 있을까. ‘사랑은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광고 카피로 써도 좋을 만큼 감각적인 시구절이지만 기형도 시를 통과하기는 쉽지 않다. 달콤한 문장 반대편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와 같은 낯선 이미지, 불투명한 표현이 적지 않아서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김현의 기형도 해석이 문단에 지배적이었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김현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한 세계다. 김현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죽음을 연상시키는 표현에 주목해, 아무런 희망 없이 죽음의 운명을 바라보는 개별자의 비극이 기형도 시의 핵심이라고 봤다.

하지만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라 예술의 착안점 또한 달라져야 한다. 임씨는 유기체적 세계관에 입각해 기형도 시를 읽을 것을 제안했다. 유기체는 자연의 운행과 생멸을 전제로 한다. 그 안에서 인간은 더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권능을 상실한 인간 화자의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건 삼라만상이다. 빗소리 같은 물리적 현상도 이 세계의 시민권을 얻는다. 문장의 의미상 주어는 위축된다. 이렇게 접근해야 ‘病(병)’의 도입부,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같은 문장들의 봉인이 풀린다는 얘기다.

김 팀장의 해석도 임씨와 일맥상통했다. 기형도 시의 시적 화자, 시의 주체를 '흐르는 주체'라고 불렀다. 고정된 단일한 화자 대신 여러 화자가 유령처럼 나타나 서로 통과하는 환상적인 장면이나, 사물이 화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인간중심적이지 않은 특징이 기형도 시에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주체를 그렇게 파악해야 '오후 4시의 희망' 같은 시에 접근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이런 주체의 분열은 2000년대 들어 젊은 시인들 작품이 빈번히 나타났다. 기형도의 영향, 기형도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얘기였다.
기형도문학관은 개관 기념으로 연속 강좌 '인문아카데미'를 진행 중이다. 임우기씨는 '기형도 시의 유기체적 상상력'이라는 제목으로 지난달 22일 강연했다. 24일 조동범 시인을 거쳐, 이달 6일 장석주 시인, 8일 박덕규 단국대 교수의 기형도 강의가 예정돼 있다(02-2621-8860). 기형도 시인의 풍부한 결을 함께 나누자는 취지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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