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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한류 시즌2 최전선 … 한국인 없는 K팝 그룹까지 키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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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논설위원이 간다 - 남정호의 '세계화 2.0'

지난달 20일은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에 새로운 획이 그어진 날이다. 한국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이 세계 최고의 무대인 '2017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 시상식에서 특별공연을 펼쳤던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변방으로 무시됐던 K팝이 당당히 세계 대중문화의 심장부를 정복한 셈이다. 이는 한국의 삼성이 소니·내셔널·샤프 등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일본 전자회사들을 제친 것과 버금갈 사건이다.
무슨 마법이 통한 걸까. 전문가들은 SM·JYP·YG 등 굴지의 기획사들이 꾸준히 추진해온 세계화 전략 덕분이라고 분석한다. K팝 세계화의 현장을 보기 위해 지난달 23일 SM 엔터테인먼트를 찾았다.

방탄소년단, 세계 대중문화 정복 #국내 기획사의 꾸준한 세계화 덕 #SM, 세계 작곡가 500명 곡 받아 #라이팅 캠프 열어 국내외 협업 #11개국에서 연습생 선발해 훈련 #K팝 그룹 육성 시스템 수출 시도

푸른 유리벽이 인상적인 서울 청담동 SM 스튜디오 빌딩.

푸른 유리벽이 인상적인 서울 청담동 SM 스튜디오 빌딩.

한강 변에 위치한 서울 청담동 SM 스튜디오 빌딩. 세련된 푸른 유리 벽이 인상적인 이 건물 3층에는 작곡·편집 작업을 위해 설계된 녹음 스튜디오가 자리 잡고 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자그마한 공간에 컴퓨터 스크린, 전자 키보드, 마이크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곳이 바로 K팝의 세계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최근 이곳에서는 매해 유럽·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유명 작곡가들과 국내파 음악가들이 나란히 앉아 참신한 노래를 창조해내는 '라이팅 캠프(Writing Camp)'가 열린다.
이젠 꽤 알려진 사실이지만 요즘 K팝 아이돌 그룹의 노래는 전 세계의 유명 작곡가들이 동원돼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SM의 경우 매주 평균 100곡씩, 한해 5000여곡의 신곡이 들어온다. 이를  35명의 전문가들이 모두 들어본 뒤 400곡 정도 추려 노래에 어울리는 소속 가수나 아이돌그룹에 준다는 것이다. 물론 선택된 곡들도 국내 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각자에게 어울리게 수정된다.
 구태여 해외 인력을 쓰는 이유를 묻자 "국내 500명의 작곡가로부터 500곡을 받느니,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5000곡을 받아 500곡을 고르는 게 훨씬 좋지 않겠느냐"고 이성수 SM 프로듀싱 본부장이 반문한다. 이렇듯 K팝의 음악 생산 과정은 국내 어느 분야보다 세계화돼 있다. 세계 최고 인재들로부터 납품받아 이중 경쟁력이 있는 제품을 골라 쓰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2014년 1월 서울 SM 청담동 사옥에서 열린 송 라이팅 캠프에서 국내 작곡가 이현승(왼쪽부터), 세계적인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 미국 작곡가 도미니크가 공동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2014년 1월 서울 SM 청담동 사옥에서 열린 송 라이팅 캠프에서 국내 작곡가 이현승(왼쪽부터), 세계적인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 미국 작곡가 도미니크가 공동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물론 초기에는 외국 전문가들로부터 더 할 수 없는 푸대접을 받았다. 국내에서 아이돌그룹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0년대에도 한국 가수들에게 선뜻 곡을 주려는 외국 작곡가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내 기획사 관계자들은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국제음악박람회(MIDEM)'로 날아가 작곡가처럼 생긴 외국인만 보면 '곡 좀 달라'고 애걸했다"는 게 이 본부장의 회상이다. 이렇듯 아무도 몰라주던 K팝에 대한 외국 작곡가들의 눈도 2000년대 들면서 확 달라졌다.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K팝이 선풍을 일으킨 덕분이다. 이 때문에 이제는 SM의 경우 500여명의 작곡가와 네트워킹을 하는 수준이 됐다. 이렇듯 충분한 인적자원이 확보되면서 SM은 2009년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해외 작곡가들을 국내외 여러 곳으로 불러 국내 음악가들과 함께 곡을 쓰게 하는 '라이팅 캠프'를 시작한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해외 작곡가들에게 K팝의 특징과 장점을 알림으로써 향후 국내 아이돌 그룹에 최적화된 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2017년 SM 글로벌 오디션 2 로고

2017년 SM 글로벌 오디션 2 로고

 노래뿐 아니다. 연습생을 뽑거나 아이돌그룹을 구성할 때도 세계 시장을 염두에 두고 캐스팅을 하고 있다. 아시아 팬들이 친숙함을 느끼도록 중국·일본·태국 출신 멤버를 일부 끼워 넣는다는 건 오래된 얘기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오디션을 실시해 꿈나무를 찾는다. SM은 '글로벌오디션'이란 이름으로 아시아는 물론 북남미 등 전 세계 11개국에서 연습생을 뽑고 있다.

걸그룹 BP라니아에서 활동했던 최초의 흑인 멤버 알렉산드라.

걸그룹 BP라니아에서 활동했던 최초의 흑인 멤버 알렉산드라.

SM뿐 아니라 다른 기획사에서도 외국인 멤버를 합류시킨다. DR뮤직은 흑인 멤버를 선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탈퇴했지만 지난 1월부터 걸그룹 BP리니아에서 활동했던 알렉산드라 레이드는 미국 흑인이다. 심지어 지난 4월 미국 뉴욕에서 결성된 EXP 에디션처럼 한국인이 한 명도 없는 K팝 그룹이 탄생하기도 했다.

한국인이 없는 K팝 그룹 EXP 에디션. 시메(왼쪽부터), 헌터, 프랭키, 코키 등 4명의 멤버 모두가 미국 뉴욕 출신이다.

한국인이 없는 K팝 그룹 EXP 에디션. 시메(왼쪽부터), 헌터, 프랭키, 코키 등 4명의 멤버 모두가 미국 뉴욕 출신이다.

 이렇듯 많은 국내 기획사들이 국제화(Globalization)와 지역화(Localization)를 동시에 추구하는 '글로칼라이제이션(Glocalization)' 전략을 펴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K팝이면서도 각국의 특징을 고려해 노래와 댄스 등을 변형시키거나 멤버들을 해당 국가 출신으로만 구성하는 방식도 시도되고 있다.
실제로 SM은 외국인 출신으로만 이뤄진 K팝 아이돌그룹을 선보이기 위해 중국·일본·태국·인도네시아 출신 연습생들을 뽑아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 한명의 한국인 멤버도 없는 그룹이, 외국 작곡가의 곡을 부르는 데 이를 K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본부장은 "한국 아이돌그룹이 부르는 독특한 형식의 노래를, 댄스와 의상 등 시각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표현한다면 총체적으로 K팝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한국인 멤버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K팝으로 부를 수 있다는 얘기다.
K팝의 세계화는 음악 제작과 캐스팅에 국한되지 않는다. 음악뿐 아니라 가수와 관련된 정보가 팬들에게 전달되는 과정도 이제는 완전한 세계화가 이뤄졌다. 과거에는 외국 배급사나 음반회사 등을 거쳐야 했지만 이젠 달라졌다. K팝 그룹이 신곡을 내면 세계 각국의 팬은 그 즉시 유튜브나 브이라인 등으로 들을 수 있다. 공연 장면뿐 아니라 스타들의 아주 소소한 일상생활까지 다 볼 수 있어 더욱 빠져들게 된다. 디지털 기술 덕분이다.

  이런 모든 요소를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익혀온 SM 등 국내 기획사들은 노래뿐 아니라 아이돌그룹 육성 시스템을 통채로 수출하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오디션을 통해 현지 유망주를 발굴하고 한국식으로 훈련한 뒤 어울리는 노래까지 줘 데뷔시킨다는 것이다. K팝 노래의 특징은 화려한 군무에 잘 어울리면서 춤을 추는 데 지장이 없어야 한다. 또 각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러 세션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시각적 요소가 강한 K팝을 외국에 무리 없이 심어주려면 캐스팅부터 트레이닝까지 모든 요소를 가르쳐 줘야 한다.
 홍석경 서울대 교수는 "K팝의 인기는 디지털과 세계화가 만난 결과"라며 "K팝 팬들이 홍대 앞 인디밴드나 이름 없는 그룹을 좋아할 정도로 이제 한류 팬 내에서도 취향의 차별화가 이뤄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류가 세계인의 성숙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이런 K팝의 세계화는 외국시장 진출을 꾀해온 국내 기획사들이 서로 경쟁하고 영향을 주면서 이뤄낸 것이다. K팝을 비롯한 한류가 순조롭게 발전하려면 국내 기획사들의 재기발랄한 창의력을 억눌러선 안 된다. 정부는 "한류를 육성하겠다며 당국이 쓸데없이 간섭하려 드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남정호 논설위원 nam.jeong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