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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구조조정은 아무나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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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 정부가 마침내 ‘구조조정’을 얘기했다. 출범 후 6개월 만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어떻게’가 잘 안 보인다.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도 알 수 없다. 27일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구조조정 3원칙’을 말했다. ①사후 대응보다 사전 예방 ②금융 논리보다 산업 경쟁력 고려 ③국책은행 주도에서 시장 중심이다. 현란한 레토릭에 비해 실체는 모호하다. 혁신성장처럼 손에 잡히는 게 없다.

백면서생에 수술칼 준 건 #안 해도 그만이란 뜻인가

우선 ①은 현실성이 없다. 은행이나 정부가 모든 기업의 부실 징후를 알아채고 예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업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부실을 숨긴다. ②산업 경쟁력을 고려한다는 말은 더 모호하다. 금융은 숫자로 기업을 평가한다. 순이익·부채비율·청산가치 같은 게 기업을 재는 금융의 숫자다. 기업의 건강도 인체와 같다. 당뇨, 간염, 혈압을 재고 수치가 높으면 약을 써야 한다. 산업 경쟁력을 재는 숫자는 뭔가. 숫자가 없다면 정실·외압, 정치적 고려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③은 더 막연하다. 구조조정엔 돈이 필요하다. 부실 청소비용이다. 주주·채권단·노동자 아무도 내기 싫어한다. 그럴 땐 누군가 앞장서야 한다. 국책은행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국책은행이 과도하게 부실을 떠안는 건 안 된다. 그렇다고 ‘국책은행 대신 시장’이란 말은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막연하다. 실체도 없다. 앞으론 국책은행 대신 시중은행이나 멀쩡한 다른 기업 팔을 꺾어 부실 처리 비용을 대도록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구조조정 3원칙보다 더 큰 우려가 있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구조조정의 사령탑을 맡긴 것이다. 백 장관은 20일 “조만간 STX·성동조선의 구조조정이 시작될 것”이라며 “앞으로 구조조정은 산업부가 주도하겠다”고 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24일 “구조조정에서 산업부가 좀 더 역할을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백운규는 신재생 에너지 전문의 교수 출신이다. 전투 경험이 없다. 구조조정은 진검 승부다. 20년 전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은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전장(戰場)”이라고 표현했다. 숙수의 손, 철석같은 심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국종 아주대병원 외상센터장은 “매번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불구만 되지 말라고 기원하며 출동한다”고 했는데 구조조정에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이런 각오 없이는 구조조정의 전장에서 하루도 버틸 수 없다. 애초 백면서생 백운규가 감당할 일이 아닌 것이다.

새로 구조조정 업무를 맡게 된 산업부는 또 어떤가. 담당 국장을 포함해 24명의 전문인력이 상주하는 금융위와는 달리 전담 부서도 없다. 새로 조직을 만들 계획도 없다. 관련 업종 담당 국·실에서 구조조정 업무까지 떠맡는 식이다. 그러면서 “(박근혜 정부처럼) 재무적인 것만 보지 않고 고용과 지역 경제까지 다 고려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구조조정이라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술하겠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그러자고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벼려온 잘 드는 칼 금융위를 제치고, 산업부에 메스를 쥐여줬나.

가뜩이나 ‘노치(勞治)의 시대’란 말까지 나오는 판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친노(親勞) 쪽이다. 그는 지난 3월 대선 때 창원을 찾아 “금융 채권자는 고통을 분담하되 (조선) 노동자와 중소 협력업체의 고통이 추가되면 안 된다”고 했다.

이쯤 되면 어지간한 숙수라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르기 어렵다. 당장 다음달로 예정된 성동·STX조선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보면 알 것이다. 이 정부가 말하는 구조조정 3원칙의 실체가 뭔지. 구조조정을 빙자한 좀비기업 구하기인지 아닌지. 이런 의심과 걱정이 단지 기우인지 아닌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