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근속 … 정년 퇴직 '뱅크 우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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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말 한국씨티은행을 정년 퇴직하는 한예석씨가 직장 후배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박종근 기자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서 '은행원=철밥통'의 등식이 깨진 지는 이미 오래다. 더구나 생존 경쟁이 치열한 외국계 은행에서 정년을 채우기란 녹록지 않은 일이다.

28일 36년간 몸담았던 한국씨티은행을 떠나는 한예석(58)씨. 그녀는 이 은행의 첫 여성 정년퇴직자이자 최장 근속 기록 보유자다. '기업금융부 전자금융부장' 이 그의 마지막 직함이다.

1970년 대학(이화여대 교육학과) 졸업과 함께 이 은행 창구직원으로 입사한 뒤 78년 전산실로 옮겨 은행 회계를 전산화하는 업무를 맡은 뒤 지금껏 전자금융 한 우물만 파왔다.

"전문적인 일을 맡게 돼 남보다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쉽지는 않았죠. 전공도 아닌 컴퓨터를 공부해야 하는 데다 1년에도 몇 번씩 세계 곳곳으로 출장을 다녀야 하는 일이어서 솔직히 여자 입장에선 힘들었어요."

전산 업무를 맡은 이후 그녀는 남자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현재 함께 일하는 부하직원 13명도 전원 남자다. 한씨는 "부러워서인지 여직원들은 나를 '대왕대비 마마'라고 부른다"며 웃었다.

중도 하차의 위기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82년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은행의 전산시스템을 전면 교체하는 일이 시작됐다. 밤샘 근무에 지쳐 하루에도 몇 차례씩 그만두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지만 어렵게 일을 배운 게 아까워 버텨냈다고 한다. 한씨는 "은행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산기를 느껴 곧장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았다"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고 했다.

85년 씨티은행 방콕지점의 전산시스템을 교체하는 책임자로 발령받았던 일 역시 기회이자 위기였다. 당시 상사였던 이성남(현 금융통화위원)씨가 "중요한 일인데 잘못되면 옷 벗을 각오를 하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질게 말씀하신 게 얼마나 고마운지…. 죽기 살기로 덤벼서 결국 성공했거든요. 그 다음엔 웬만한 일은 일 같지도 않더라고요."

직장생활을 오래 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한씨는 ▶승진이나 연봉에 연연하지 말고 일을 즐기고 ▶나이 어린 상사가 와도 기분 나빠하기보다 배울 점을 찾고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쯤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녀는 퇴직 후를 대비, 2002년 제주도에 초콜릿박물관과 공방을 마련했다.

한씨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초콜릿을 열심히 공부해 대한민국 최고의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일'에 전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신예리 기자<shiny@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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