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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부 시동건 '노동이사제'…낙하산 방지냐 경영권 침해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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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호 11면

문재인 정부가 시동 건 노동 이사제

국민연금을 등에 업고 이사회에 노조 측 인사를 참여시키려는 금융노조의 시도는 일단 무산됐다.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KB금융지주 임시 주주총회에서 노조가 추천한 하승수 변호사(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의 사외이사 선임안이 부결된 것이다. 우리사주 지분(0.18%)을 활용한 노조 측 제안에 대한 찬성률은 13.7%에 그쳤다. 이마저 국민연금(9.8%)을 제외하면 찬성한 주주들이 4.9%에 불과하다.

서울시 도입 이어 KB서도 시도 #노조 목소리 경영에 반영 의도 #현대차, 한때 노동자 이사 검토 #“독일식 제도 이식 무리” 없던 일로

24일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노사 합의가 먼저”라며 노조 측 인사의 이사회 진입 문제에 선을 그었지만, 국민연금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KB금융과 비슷한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권은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현재 국내 상장 은행지주사 7곳 가운데 KB금융·신한지주·하나금융·BNK금융·DGB금융지주의 1대 주주다. 더군다나 ‘근로자 이사제(노동 이사제)’는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다. 대선 기간 중 문 대통령은 “공공부문과 4대 재벌부터 노동 이사제를 도입하고 민간기업으로 확산하겠다”고 밝혔다. 금융권이나 공공기관뿐 아니라 민간영역 전체까지 대상이 넓어질 수 있는 셈이다.

노동 이사제는 본디 유럽의 제도다. 1951년 독일의 탄광·철강 노조부터 시작해 프랑스·스웨덴 등 유럽 총 19개국에서 활용하고 있다. 근로자가 경영자와 동등한 입장에서 기업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도입 찬성론자들이 모범 국가로 꼽는 독일은 76년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사민당 내각 시절 공공기관·민간기업 모두 500명 이상의 종업원이 근무하는 사업장이면 근로자 이사를 두도록 법제화했다.

체코·스페인 등은 관련 조항 삭제

민주노총을 노사정위원회에 다시 참석시켜 협상의 파트너로 삼으려는 문재인 정부나 시민단체·노조 등에서는 노동 이사제 도입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미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조례를 개정, 서울연구원 등 투자출연기관 16곳(상시근로자 수 100명 이상)에서 근로자 대표 1~2명을 이사회에 참여시켰다.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은 “사회갈등으로 인한 손실이 엄청난 상황에서 노사 상생과 협력을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동계 인사가 기업 이사회에 포진한다면 한국의 대립적 노사 관계를 해소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사실 한국 기업이라고 마냥 근로자의 이사회 참여를 반대해 온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현대차만 하더라도 2000년대 초반부터 독일 다임러·폴크스바겐 사례를 참고해 근로자의 이사회 참여 방안을 수년간 검토했다. 실제로 2003년과 2005년, 2011년 임금 및 단체협상(임단협)에서 근로자의 이사회 참여 여부를 놓고 노조와 협상을 벌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당시 현대차 노사업무 담당 임원은 “컨베이어 벨트 속도, 인력 전환배치, 심지어 해외 투자도 노조 허락을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아예 노조의 목소리를 이사회 영역으로 편입시킨다면 오히려 강성 노조 문제가 완화되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한국 실정에서 독일식 제도를 그대로 이식한다면 경영권의 본질적 요소를 침해받을 수 있어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설명했다.

한국과 달리 독일은 2원적 이사회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일반적인 경영 이사회와 이를 견제하는 성격을 띠는 감독 이사회 구조다. 근로자 이사는 감독 이사회에만 참여한다. 감독 이사회는 주주총회에서 선출된 주주이사와 노동조합 등에서 추천한 근로자 측 이사 절반씩으로 구성된다. 이마저 노사 간 의견이 5대 5로 대립하면 최고경영자(CEO)가 직권으로 최종 결정한다. ‘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의 주된 사항은 근로자와 직결된 인사·복지 문제에 국한된다.

독일에서도 노동 이사제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를 놓고 현재까지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2005년 폴크스바겐에서는 이사회에 진출한 노조 간부의 섹스 관광, 불법 보너스 수수 같은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감독 이사를 맡고 있는 노조 인사가 회사의 경유차 연비 조작 사실을 묵인·방조했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영국서는 도리어 도입 움직임

폴크스바겐과 같은 가문 소속인 포르셰나 알리안츠·바스프 등 독일 대기업은 ‘유럽주식회사(SE)법’을 탈출구로 삼았다. 유럽주식회사법에는 근로자를 이사회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강제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의무화된 감독이사 수도 독일(20명)에 비해 유럽주식회사(5명 이상)가 적다. 최근에는 체코·스페인이 노동 이사제를 법제화했던 조항을 삭제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독일 경제가 2000년대 들어 되살아난 이유는 사회적 조합주의 덕분이 아니라 노조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는 등 독일식 전통과 어긋난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한 까닭”이라며 “유럽에서도 퇴조하고, 자유시장경제를 명시한 헌법 119조 1항에도 배치되는 제도를 정치인들이 들여오려 한다”고 지적했다.

유럽 대륙과 달리 주주 자본주의를 고수한 영국은 근로자의 이사회 참여를 모색하려는 이색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보수당 출신의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지난해 7월 총선 때 모든 기업에 노동 이사제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영미권 기업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노조의 경영 참여를 배제했던 것도 아니다. 영국철강과 미국 크라이슬러는 노사 합의로 기업이 자율적으로 노동 이사를 선임하고 있다.

오너 없이 관치에 노출된 한국 금융권의 경우 노동 이사제가 ‘낙하산 인사’ 선임을 막는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일단 기획재정부는 내년 공공기관 노동 이사제 시행을 목표로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창양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는 “공공기관이나 정부출연기관에선 도입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근로자 이사제는 기본적으로 주식회사 제도와는 결이 맞지 않는다”며 “정부가 법으로 이를 강제하거나 국민연금을 동원할 경우 주주가치를 훼손할뿐더러 경영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brad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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