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0시간이 넘는 항해가 끝나가고 선실 창밖으로 어슴푸레 항구의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거대한 페리는 스플리트 항을 향해 마지막 뱃고동을 울렸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올라갔다. 여객선의 넓은 식당 안에 동양인 관광객은 우리뿐인 듯하다.
장채일의 캠핑카로 떠나는 유럽여행(7) #로마 황제가 은퇴 후 여생 보내려고 지은 궁전 #미로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구시가 그리드 지역 #시간이 멈춰선 듯한 골목길 풍경 사진에 담아
승객들이 모두 내린 후 차들의 하차가 시작되었다. 페리 내부 양쪽 화물칸에 빈틈없이 실린 대형 카고트럭, 버스, 캠핑카와 승용차들이 차례로 이중삼중의 고박장치를 풀고 하나씩 배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풍랑에 흔들리거나 미끄러질 수도 있는 화물들을 고정하지 않고 항해에 나섰다가 사고를 당한 세월호가 대비되어 떠올랐다. '하룻밤 항해에 저렇게까지 단단히 고정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하지만 사고는 순식간이다. 미련할 정도로 철저하게 원칙과 안전수칙을 지키는 선원들의 모습이 믿음직하다.
그런데 스플리트 항 선착장에서 입국 신고식을 제대로 치를 뻔했다. 검문소 앞에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 속에서 입국심사를 마치고 심사대를 빠져나올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한 노인이 지팡이를 휘저으며 우리 차를 멈춰 세웠다. 알고 보니 바로 머리 위로 설치된 높이 제한 구조물보다 차체가 높았던 것.
하마터면 선루프 등이 박살 나 천정이 뻥 뚫린 채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여행하거나, 아니면 망가진 차량을 수리하러 며칠 동안 여기저기 헤맸을 것이 틀림없다. 혼비백산해 '땡큐'를 연발하고 차를 돌려 빠져나왔지만 생각해 보면 잠시 차를 멈추고 내려 그 노인에게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어야 할 일이다.
이탈리아에서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으로 항로가 바뀌는 바람에 예정에 없이 오게 된 스플리트. 비록 계획 없이 왔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서운하다. 부두 옆 주차장에 잠시 차를 세우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시장 구경을 하고 나서 방문한 곳은 천 년이 넘는 구시가 그라드 지역이다. 이곳은 고대 로마 황제가 은퇴 후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었던 궁전이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은 궁전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길들이 사방으로 미로처럼 뻗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해 온 건물들은 지금도 멋진 상점과 카페 등으로 쓰이고 있다. 황제가 연회를 열었던 광장은 석회암 기둥만 가지런하게 남은 채 여행자들의 쉼터와 이정표가 됐다.
아침 출근길의 사람들로 분주한 중앙통로를 벗어나 구시가 뒤편 골목길로 들어서면 또 다른 중세의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듯 고요함과 적막함만 가득하다. 이곳은 마치 시간이 멈춰선 듯하다. 오랜 석조 건물들 사이로 이어진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시간의 조각들을 카메라에 주워 담았다.
우연히 찾게 된 발칸의 오래된 도시 스플리트. 비록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일상의 모습과 세월의 흔적이 묵직한 무게와 감동으로 다가와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이제 스플리트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마트에서 빵과 소시지, 음료와 와인 등을 잔뜩 사서 캠핑카 냉장고며 수납공간을 빵빵하게 채우고 나니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다.
다음 여정은 국경 넘어 유럽의 빈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와 메주고리에. 구글맵을 찍어보니 대략 차로 4시간여 거리이다. 정보 검색을 해보니 도로 사정이 열악해 예정된 시간보다 도착시각이 지연될 수도 있단다. 그러나 캠핑카에 식량이 가득하니 무엇이 걱정이랴? 힘차게 출발이다.
장채일 스토리텔링 블로거 blog.naver.com/jangchai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