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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한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미국이 북한을 9년 만에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고 중국 기업까지 포함된 추가제재에 나서기로 한 것은 "북한이 고통을 느낄 때까지 최대한의 압박을 가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다.
미국의 이 같은 결정은 북핵 문제의 해법을 놓고 강공보다는 대화를 선호하는 한국과의 물밑 조율이 순탄치 않다는 것도 보여준다. 따라서 잠시 진정되는가 싶던 북·미 간 긴장이 다시 고조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로선 4 No(북한 정권교체, 정권붕괴, 흡수통일, 침공은 없다) 원칙도 밝혀보고, "김정은과 친구가 되려 애쓰고 있다"는 메시지도 던져 봤지만 꼼짝도 않는 북한을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최종적으로 내린 것으로 보인다.
'협상파'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마지막까지 재지정을 유보하려 시도했지만 "백악관은 재지정 방침을 일찍 정했다"(외교 고위관계자)는 후문이다. 실제 이날 트럼프는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밝히면서 "(김정은 정권은) 살인 정권", "더 오래 전에 했어야 했다"는 거친 발언을 쏟아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연설비서관이었던 마크 티센 미국기업연구소(AEI) 연구원은 "앞으로 북한을 쥐어짜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고 분석했다.
미 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면서 근거로 삼은 건 크게 두가지.
첫째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이복형인 김정남을 지난 2월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신경가스로 독살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에 억류됐던 미 대학생 웜비어가 지난 6월 북한에서 식물인간 상태로 풀려난 지 6일 만에 숨진 사실이다. 웜비어 사망에 충격을 받은 미 의회가 지난 8월 "90일 이내에 국무장관이 테러지원국 재지정 여부를 결정하라"는 법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미 정부로선 재지정 여부를 결정해야만 했다.
미 정치권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은 "이복형을 뻔뻔하게 암살하고 웜비어를 잔인하게 고문해 비극적 죽음으로 이끈 건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북한의) 일관되게 자행한 테러의 패턴"이라고 주장했다. 코리 가드너 상원 외교위 동아태소위 위원장은 "우리는 이 악(evil)을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꼼짝않는 북한에 '최대 압박' 가하겠다는 신호 #단기적으론 북·미간 긴장고조, 북한 도발 가능성 #장기적으론 '테러지원국 해제' 카드 마련된 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면서 북한 김정은 정권을 "살인 정권"으로 호칭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면서 북한 김정은 정권을 "살인 정권"으로 호칭했다.

이번 결정의 배경에는 이 같은 표면적 이유 외에도 북한이 전혀 미국의 대화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고, 중국을 통한 간접 설득도 무위에 그친 데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의 고위 외교 소식통은 "2~3개 채널을 통한 북미 접촉은 지난 6~8월 이후엔 별 진전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게다가 최근 쑹타오(宋濤)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특사자격으로 북한을 갔는데도 별 성과없이 빈 손으로 귀국하자 망설임없이 재지정에 나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보면 향후 가능성이 있는 북·미 간 핵·미사일 협상에서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또 하나의 카드를 갖게 되는 전략적 판단을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트럼프는 테러지원국 재지정에 멈추지 않고 재무부를 통해 '매우 거대한 추가제재'를 발표할 것을 예고했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스티브 므누신 미 재무장관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미 재무부는 21일(현지시간) 북한에 대한 추가제재안을 발표한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오른쪽)과 스티브 므누신 미 재무장관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미 재무부는 21일(현지시간) 북한에 대한 추가제재안을 발표한다.

21일(현지시간) 부터 2주에 걸쳐 발표될 대북 추가제재에 대해 틸러슨 국무장관은 "북한과 관련된 기관과 개인들이 추가 제재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여기에는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은행과 기업이 제재 리스트에 오를 것"이라고 전했다. 트럼프가 언급한 '매우 거대한 것'과 관련,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제재대상에 포함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지만 이 관계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북한과 정상적 거래를 하는 중국 등 제3국 기업의 기업·금융기관까지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도 이번 발표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테러지원국 재지정의 효과에 대해 대다수 전문가들은 "실질적 효과는 없고 김정은 정권의 잔악성과 비도덕성을 부각시키는 상징적 효과에 그칠 것"이라 내다봤다.
무기수출금지, 무역제재, 대외원조 금지 등의 제재조치가 이미 유엔 등을 통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북한이 이 문제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별 게 아닌 게 될 것"이란 말로 별 파급효과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대니얼 러셀 전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테러지원국 재지정은 유리 케이스에서 여러 트로피 중 하나를 꺼내 산산히 부순 것과 같다"고 말했다. 북·미 간 타협의 상징(2008년 테러지원국 해제)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린, 의미가 큰 행위라는 지적이다.
이런 점 때문에 한국 정부는 "발표 시에 이번 조치는 대북 정책의 변화를 뜻하는 건 아니며, 언제라도 (북한과) 대화에 나설 것이란 메시지를 밝혀달라"는 희망을 미국 측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틸러슨 장관은 이날 발표에서 "우리는 여전히 외교를 희망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이번 조치로 대화 가능성을 모색하던 북·미 관계가 급속히 냉각될 가능성이 크다.
앤드류 여 워싱턴 카톨릭대 교수(정치학)는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추가적인 장애물이 생긴 셈"이라며 "북한이 미사일 발사나 사이버공격 같은 도발로 맞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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