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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외교안보 라인 쇄신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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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유출자는 제 본연의 임무와는 동떨어진 사안에 집착했다. 도대체 '대통령 의전'과 '전략적 유연성'이 무슨 연관성이 있기에 이런 짓을 했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또 유출자에게 기밀문건을 전달한 사람은 '대통령의 문고리'라고 불리는 제1부속실 소속 행정관이었다. 대통령에게 어떤 보고가 올라가는지 파악할 수 있는 핵심자리다. 이런 사람이 비밀접근권이 없는 의전비서관실 직원에게 비밀문건을 건넨 것이다. '외교부 선배'라는 이유 하나로 나라의 안보와 직결된 중대한 대외정책에 관한 비밀문서를 주고받은 것이다.

유출 자체도 어이가 없지만, 더 큰 우려는 이들이 이런 짓을 서슴없이 할 수 있도록 한 배경이 무엇이냐다.

'대미 자주' 등 특정 이념에 경도된 세력들이 청와대 안팎으로 연계돼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 아닌가. 행정관 수준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는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2004년 1월 15일 윤영관 외교부 장관의 경질과 관련해 당시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이 한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외교부 일부 직원들이 과거의 의존적 대외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참여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자주적 외교정책의 기본정신과 방향을 충분히 지향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정권의 외교노선은 '자주', 사실상은 '대미 자주'이며 여기서 벗어나는 세력은 교체하겠다는 공식선언이었다. 따라서 이후 우리 외교안보라인 곳곳에 형성된 '거대한 대미 자주파'의 세력이 이번 비밀 유출의 배경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현재 한.미 간에는 휘발성이 강한 민감한 이슈가 아직도 많이 놓여 있다. 미군기지 이전은 반미세력의 노골적인 방해 책동에다가, 합의 당시보다 엄청나게 올라가는 이전 비용 문제 등으로 여전히 삐걱대고 있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벌써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번 문서 유출자의 적발로 대미 자주 세력의 위세는 약화할 것으로 보이나, 아직도 청와대를 비롯해 군.시민단체 등 곳곳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향후 벌어질 상황이 간단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미 자주'의 기치 아래 추진했던 정책도 지지부진하다. 한.미동맹을 기축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맡겠다는 '동북아균형자'론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미국과 원만하게 타협을 한 것은 평가된다. 그러나 처음에 내세웠던 '자주'의 입장에서 보면 후퇴한 측면이 있는 합의 내용을 감안하면 그동안 공연한 분란만 피운 것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은 외교안보의 난맥상을 직시하고 이제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청와대 비서관들의 기밀문서 유출은 노 대통령에 대한 우롱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 정한 결정을 공직자라면 절대로 해선 안 될 행위를 통해 뒤집으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해당자의 '부주의한 처신'으로 돌리며 적당히 무마하려 해선 안 된다. 어느 조직에서나 다른 실수는 몰라도 비밀 관리 분야에서의 잘못은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린다. 하물며 나라의 안보 문제에 직결된 사안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뒤 외교안보 라인을 제대로 재정비해 더 이상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안희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