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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자와 당한 자 미묘한 동거, 아직도 도시 곳곳 수난의 상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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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내년 독립 100주년 맞는 라트비아 수도 리가를 가다

‘검은 머리 전당’. 검은머리형제단은 독일에서 온 상인들의 조합이다. 이들의 숙소와 연회장으로 쓰였다.

‘검은 머리 전당’. 검은머리형제단은 독일에서 온 상인들의 조합이다. 이들의 숙소와 연회장으로 쓰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게 소원입니다. 최소한 주변 5㎞엔 아무도 안 사는 그런 곳이요.”

국경 주변에 전나무 100그루 심어 #두 민족 갈등 극복하고 도약 모색 #거리엔 엑소·방탄소년 등 한류 붐 #베요니스 대통령 “한국 보며 용기”

라트비아 수도 리가의 한 술집에서 만난 20대 청년의 얘기다. 기자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자 함께 있던 이곳 정부 관계자는 “라트비아인에게 ‘언제 행복하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라고 대답한다”고 소개했다.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심정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수난당한 상처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느낄 정도인데, 어른들은 얼마나 더 심하겠어요.”

청년이 말한 ‘수난의 상처’란 강대국으로부터 침략받은 과거다. 라트비아는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가운데 있다. 자연스럽게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스웨덴·폴란드·독일·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은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리가 거리를 걸으며 청년의 말을 되새겨 봤다. 도시의 풍경은 물빛을 닮았다. 짙은 푸른빛을 반사한 건물 유리창, 아르누보 양식의 파스텔톤 건물들은 섬세한 장식 문양과 색감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도시 건물들은 아픈 역사의 흔적을 숨기지 못했다. 13세기에 번영을 누렸던 도시 여행의 시작 지점인 ‘검은 머리 전당’부터 그렇다. 700년 가까이 이곳을 지켜온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2001년 다시 지은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 대부분이 손상됐고,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이 들어와 독일의 잔재라는 이유로 완전 철거했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마련된 박물관엔 파괴된 흔적의 일부가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만난 대학생 율리아는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상징하는 자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찾을 때 색다른 감정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왜 20대 청년이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조용히 살고 싶다’고 말했는지 조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율리아는 러시아 출신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얘기해줬다. 소련이 철거했던 건물 안에서 대화가 시작됐기 때문인지, 이런 얘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출신의 라트비아 인구 비율은 26%였다. 하지만 아직 리가에 사는 러시아 출신의 비율은 40%가 넘는다고 한다. 리가 시장도 러시아 출신이다. 라트비아에 아픔을 줬던 민족이 아직 이 나라의 주류 세력이란 얘기다. 율리아는 “이 때문에 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두 민족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다”며 “때로는 긴장감이 돌 때도 있다”고 말했다.

베요니스 대통령

베요니스 대통령

실제 해마다 5월 9일이면 이 같은 긴장감은 현실로 드러난다고 한다. 이날은 2차대전에서 소련이 독일의 항복문서를 승인한 날이다. 러시아 입장에선 전승기념일이다. 라트비아 내 러시아 사람들도 이날을 공개적으로 기념한다.

반대로 라트비아인들에게 그날은 아픔의 역사다. 2차대전 후 소련으로 강제 병합돼 어렵게 찾았던 독립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5월 9일이면 한쪽에선 축제가 벌어지고, 다른 한쪽에선 역사의 아픔을 되새기는 일이 벌어진다. 현지 가이드는 “이날이 되면 평화로운 도시에 두 민족 간 보이지 않은 벽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며 “거리에는 러시아인만 나와 이날을 기념할 뿐 라트비아인은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라트비아는 18일 독립 99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 같은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과 도약을 노린다. 1918년 11월 18일은 1차대전 직후 시민혁명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날이다. 이를 위해 라트비아 정부는 최근 국경 주변을 따라 전나무 100그루를 심었다. 내년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의 첫 단계다. 이 밖에도 이곳 정부는 전통의상 축제, 독립 100주년 영화제 등을 준비하고 있다.

베요니스 라트비아 대통령도 독립 100주년 행사를 통해 한국과의 우호 증진을 다짐했다. 리가 거리에선 엑소와 방탄소년단 등 K팝 노래를 흔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한류 붐이 일고 있다. 베요니스 대통령은 “내년 평창 겨울올림픽에 우리나라 인사들을 초대해 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 마음”이라며 "한국의 발전한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독립 100주년의 해에 열리는 국제 스포츠 행사에 초청 받은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우리 독립 100주년 행사에 꼭 한국 인사들을 초청해 우호를 다질 것”이라고 말했다.

리가=글·사진 배재성 기자 hongdoy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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