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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떠도는 고려인 후예들 "90일마다 우즈벡 추방 슬퍼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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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4세 남매인 박니키타군과 박엘리자벳양이 지난 10일 광주 지역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의 교실 창가에서 교정 밖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고려인 4세 남매인 박니키타군과 박엘리자벳양이 지난 10일 광주 지역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의 교실 창가에서 교정 밖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어린 딸을 데리고 90일마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는 삶이 너무도 힘듭니다. 제발 할아버지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맘 놓고 오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고려인들, 체류 불안·고용 사기 피해 속출 #한국에 부모 없는 4세들도 여전히 '떠돌이' #4000명 모여사는 '광주 고려인마을' 가보니 #"한국말 서툴러"…일자리·생활여건 취약 #"4세들, 정부의 한시적 비자연장 미봉책" #전문가들, "특별법 통과로 권리 찾아줘야"

지난 10일 오후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에서 만난 김례나(22·여·가명)씨는 연신 눈물을 쏟아냈다. 2년 전 3살짜리 딸과 함께 한국에 들어온 후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과 재입국을 반복하면서 겪었던 고통들이 떠올라서다.

 지난 10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를 찾은 고려인 여성들이 신조야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왼쪽)에게 취업 및 육아상담을 받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10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를 찾은 고려인 여성들이 신조야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왼쪽)에게 취업 및 육아상담을 받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고려인 4세인 김씨는 2015년 10월 단기방문비자(C3-8)로 입국한 후 3개월에 한 번씩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을 오가는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고려인 4세의 경우 장기체류 비자를 받지 못해 만20세가 되면 90일마다 자신이 태어난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해야 한다.
현행 ‘재외동포법’에는 고려인의 경우 3세까지는 ‘재외동포’로 인정받지만 4세부터는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김씨는 “딸을 어린이집에 맡긴 채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데도 비행기 티켓을 살 돈조차 벌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신조야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와 고려인 여성들이 지난 10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신조야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와 고려인 여성들이 지난 10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올해로 고려인들이 러시아로 강제 이주된 지 80년이 됐지만 한국에 들어온 고려인들은 여전히 취약한 삶을 살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고려인 4세에 대한 체류여건이 다소 완화됐지만 서툰 언어와 열악한 취업환경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다.

고려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이주한 한인들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는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극심한 차별대우와 궁핍한 삶을 살았다.

러시아 이주 초기 고려인들. [사진 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

러시아 이주 초기 고려인들. [사진 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

조부나 증조부의 고향을 찾아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들은 국내 도시 곳곳에서 모여 사는 경우가 많다. 낯선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거나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고려인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중 광주광역시에 있는 고려인마을은 국내 대표적인 '고려인 커뮤니티'로 꼽힌다. 현재 한국에 있는 고려인 4만여 명 중 4000여 명이 광산구 월곡·산정·우산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1만여 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고려인들이 사는 집결지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모여든 안산 등 수도권과는 달리 광주는 실제 거주를 위해 가족과 함께 정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광주 고려인마을에 사는 고려인들이 지난 7일 마을을 방문한 우즈베키스탄의 아크타무 카이토프 고용노동부장관을 기다리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광주 고려인마을에 사는 고려인들이 지난 7일 마을을 방문한 우즈베키스탄의 아크타무 카이토프 고용노동부장관을 기다리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고려인들이 광주에 둥지를 튼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다. 주로 도농복합 지역인 광산구 외곽의 농촌이나 인근 하남공단에서 일자리를 구하다 보니 집값이 싼 광산구 외곽지대에 모여 살게 됐다. 월곡동과 우산동 원룸촌이 ‘고려인마을’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은 ‘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지역아동센터와 어린이집, 청소년문화센터, 상담소, 쉼터 등이 고려인들의 한국 생활을 돕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난 뒤 중도입국한 자녀들을 위한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와 자원봉사, 협동조합, 미디어센터 등도 활성화 돼 있다.

지난 10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를 찾은 고려인 여성들이 신조야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에게 취업 및 육아상담을 받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10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를 찾은 고려인 여성들이 신조야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에게 취업 및 육아상담을 받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하지만 고려인들은 다양한 커뮤니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한국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고려인 4세의 경우 만20세가 되면 3개월에 한 번씩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등으로 출국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 게 대표적이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오는 2019년 6월까지 한시적으로 고려인 4세들이 국내에 체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올해 8월 김알렉산드라(56·여)씨의 편지를 받은 청와대 측이 4세들에게 방문동거비자(F1)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부모와 헤어지는 아픔을 덜어준 것이다. 고려인 3세인 김씨는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문'을 통해 '2016년 한국에 들어온 후 2년이 안 되는 동안 6번이나 러시아로 출국했다 돌아온 딸의 이상한 여행을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고려인 4세 남매인 박니키타군과 박엘리자벳양이 지난 10일 광주 지역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의 교실 창가에서 교정 밖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고려인 4세 남매인 박니키타군과 박엘리자벳양이 지난 10일 광주 지역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의 교실 창가에서 교정 밖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하지만 정부의 이번 조치 역시 사각지대가 많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법무부의 시행령에는 '부모가 한국에 거주 중인 고려인 4세대'로 규정되면서 부모가 한국에 없는 고려인들은 여전히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딸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고려인 4세 김례나씨 역시 기존처럼 출국과 입국을 반복해야 하는 처지다.

고려인들이 한국말에 서툰 것도 한국생활에서 겪는 가장 큰 애로점 중 하나다. 대부분의 고려인이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 해 근무여건이 열악한 공장이나 농촌 지역에서 시간제 근로 형식으로 일하고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의 경우 성인 3500여 명 가운데 51%(1780여 명)가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45%(1600여 명)가 일용직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한국에 중도 입국한 고려인 4세 학생들이 지난 10일 광주 지역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한국에 중도 입국한 고려인 4세 학생들이 지난 10일 광주 지역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다문화학교인 광주 새날학교 이천영(57) 교장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인 고려인들이 떳떳하게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언어·문화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며 “국회에 계류 중인 ‘고려인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이 반드시 통과돼 그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 고려인마을. 프리랜서 장정필

광주 고려인마을. 프리랜서 장정필

고려인 4세대들을 겨냥한 비자 연장이나 취업알선을 미끼로 한 각종 사기와 임금 체불사건도 속출하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자녀들의 영주권을 취득해주겠다”고 속여 리모(44·여)씨 등 고려인 3명에게 1430만원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김모(44)씨가 구속되기도 했다. 신조야(62·여)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는 “광주에서 함께 모여 살기를 희망하는 고려인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데도 여전히 비자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힘든 생활을 하는 동포들이 많다”고 말했다.

광주 고려인마을에 사는 고려인들이 지난 7일 마을을 방문한 우즈베키스탄의 아크타무 카이토프 고용노동부장관을 기다리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광주 고려인마을에 사는 고려인들이 지난 7일 마을을 방문한 우즈베키스탄의 아크타무 카이토프 고용노동부장관을 기다리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고려인들에 대한 의료 지원을 강화해달라는 목소리도 높다. 고려인들의 경우 국내 체류기간이 90일이 넘어야만 건강보험 가입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입국 후 3개월 내에 병이 날 경우 병원비를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지난 9월에는 광주에서 일하던 고려인 동포 3세 손에브게니(36)씨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가 버스 안에서 숨지기도 했다. 손씨는 지난 8월에 입국해 냉장고 조립업체에서 일하던 중 다리가 심하게 붓는 증세에 겪었지만 국내에 들어온지 40일밖에 되지 않아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다. 결국 통증을 견디지 못한 손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가 변을 당했다.

광주 고려인마을. 프리랜서 장정필

광주 고려인마을. 프리랜서 장정필

재외동포연구원 원장인 임채완(66)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재외동포법상 고려인 4~5세대들은 같은 동포인데도 ‘외국인’ 취급을 받고 있다”며 “다양한 언어 교육을 통해 고려인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장기체류가 가능한 재외동포비자(F4)나 영주권을 주는 방법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 고려인마을은 광주 지역의 고려인 중 80%(3200여 명)가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어서 양국 정부의 관심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지난 7일 우즈베키스탄의 아크타무 카이토프 고용노동부장관이 방문한 데 이어 오는 21일에는 샤프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다.

박용수(60)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은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조만간 광주 지역에 영사관을 설치할 예정"이라며 "한국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고려인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비자 문제나 한국어 교육 사업에 우리 정부와 각 지자체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7일 광주 고려인마을을 방문한 우즈베키스탄의 아크타무 카이토프 고용노동부장관이 광주 고려인마을에 사는 여성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뒤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지난 7일 광주 고려인마을을 방문한 우즈베키스탄의 아크타무 카이토프 고용노동부장관이 광주 고려인마을에 사는 여성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뒤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광주광역시=최경호 기자 ckhaa@joongang.co.kr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의 이천영 교장이 지난 10일 고려인들에 대한 비자제도 개선과 한국어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의 이천영 교장이 지난 10일 고려인들에 대한 비자제도 개선과 한국어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러시아 이주 초기 고려인들. [사진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러시아 이주 초기 고려인들. [사진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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