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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된 한국 미라들, 박물관 아닌 화장터 갈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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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인터뷰 │ 한국 미라 연구 병리학자 김한겸 교수

김한겸 교수가 학봉장군과 부인 미라 대장에서 찾은 간디스토마 알의 현미경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민물고기를 회로 먹어 간디스토마에 감염됐다는 뜻이다. [김춘식 기자]

김한겸 교수가 학봉장군과 부인 미라 대장에서 찾은 간디스토마 알의 현미경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민물고기를 회로 먹어 간디스토마에 감염됐다는 뜻이다. [김춘식 기자]

600년 된 미라들 화장터 갈 위기 … 정부 관리체계 없어 기증도 안 돼

발견자가 연락해와 8구 소장 #연구 끝나면 모두 화장해야 #미라 속 꽃가루·기생충알로 #수백년 전 질병·식습관 밝혀 #정부선 옷·장신구만 가져가 #과거 고증, 혼자 하기는 벅차

“조선시대 때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고 10㎝ 두께의 좋은 소나무 관에 묻혔던 분들이 지금은 헐벗은 채 합판 관에 누워 있습니다. 곧 화장터로 가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미라를 홀대할 수 있나요.”

지난달 26일 서울 구로구 고려대 구로병원 장례식장 옆 부검실. 책장처럼 생긴 거치대에 관 4개가 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이 병원 병리과 김한겸(대한병리학회 회장) 교수가 ‘여흥이씨 오산 전처’라고 적힌 관을 내린다. 2010년 경기도 오산에서 발견된 30대 초반의 여자 미라다.

관 뚜껑을 여니 키 1m50㎝가량의 미라가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입을 벌리고 있다. 길고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카락이 많고 치아·손톱·발톱이 온전하다. 흉곽·배·팔·다리 등 신체 윤곽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 초기 또는 중기에 살던 여인으로 추정된다.

맨손으로 미라의 왼팔(하박)을 조심스레 만졌다. 바싹 말라 있다. 손가락으로 눌러 보니 나무토막처럼 딱딱하다.

“발견 당시 촉촉하고 탄력이 있었는데 실온에 보관하다 보니 다 말라버렸어요.”

김 교수의 설명이다. 고대안암병원 장례식장 냉동고에 미라 4구가 더 있다. 왜 미라가 박물관이 아닌 병원에 있는 걸까. 김 교수는 “미라의 옷·장신구는 중요한 사료라며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정부가 한 일이라곤 그게 전부”라고 말했다. 합판 관도 개인 돈(30만원)으로 샀다.

김 교수는 국내 몇 안 되는 미라 전문가다.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보관하는 미라 8구가 화장로에 들어갈 위기에 처해 있어서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미라를 그냥 시신으로 본다”고 탄식했다.

2010년 오산에서 남편 시신과 함께 발견된 첫째 부인(오른쪽)과 둘째 부인 미라. 조선 초기 또는 중기 여성으로 추정된다. [사진 김한겸]

2010년 오산에서 남편 시신과 함께 발견된 첫째 부인(오른쪽)과 둘째 부인 미라. 조선 초기 또는 중기 여성으로 추정된다. [사진 김한겸]

미라 8구는 어디서 났나.
“한국에는 미라 관리 체계가 없다. 발견자가 나한테 연락해서 가져왔다. 공사 중 발견한 미라가 많을 텐데, 대개 화장 처리되거나 다시 묻힌다. 연구한 미라도 나중에 화장터로 간다. 최근 유전자 분석으로 동맥경화 유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진성이낭 미라’도 화장됐다. 발견 7년 만이다.”
미라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미라 연구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 기술의 융합이다. 미라를 만났을 때 떠오르는 궁금증·가설을 과학기술과 문헌으로 검증한다. 그러면 한국의 질병 지도나 수백 년 전 생활 습관을 밝힐 수 있다. 2004년 대전에서 발굴된 ‘학봉장군’ 미라를 보자. 내시경으로 보니 기관지·위장에서 수생식물 애기부들 꽃가루가 나왔다. 간에서 간디스토마 알이 많이 나왔다. 낚시하며 회를 먹다가 익사한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꽃가루가 다른 힌트를 줬다. 『동의보감』에 피를 토할 때 애기부들을 먹는다고 돼 있다. 왜 피를 토했을까. 폐에 답이 있었다. 다른 미라의 폐는 주먹보다 작게 오그라들었는데 학봉 미라는 그대로였다. 기관지 확장증을 앓다가 사망한 것이다.”
간디스토마 알은 뭘 말하나.
“학봉장군은 부인과 같이 발견됐다. 부인 미라에서도 간디스토마 알이 발견됐다. 당시 남녀 할것없이 날 생선을 즐겨 먹었다는 뜻이다. 족보 분석과 탄소연대 측정으로 1400년대 초에 사망한 것으로 나왔다. 이렇게까지 밝혀내는 데 X선·CT·MRI와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 등 다양한 과학기술을 적용했다.”
부부의 미라가 화장됐나.
“학봉장군 미라는 다행히 대전의 한 개인 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 측이 보관하기 힘들다고 해서 부인 미라는 내가 가져왔다. 생이별이다. 부인이 화장되면 학봉장군 혼자 남는다.”
미라를 왜 화장하나.
“병원이 미라를 보관하는 곳은 아니다. 내가 3년 후 퇴직하면 미라가 화장터에 갈 수밖에 없다. 미라 연구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과거를 고증하는 작업이다. 돈과 시간이 들어간다. 이제는 혼자 하기 벅차다.”
외국은 어떤가.
“이탈리아의 5300년 된 미라 아이스맨 ‘외치’는 1991년 알프스 산맥 빙하에서 발견된 이후 전담 연구소가 설립됐다. 지금도 빙하와 똑같은 기압·온도에 보관돼 있다.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해 사망 원인, 생김새, 목소리를 복원했다. 미라를 없애면 우린 더 이상 과거를 알 길이 없다. 미라도 유물이다. 문화관광체육부와 국립박물관이 나서야 한다.”

이민영 기자 lee.mi nyoung@joongang.co.kr

[S BOX] 얼굴 검은 ‘흑미라’ 버선에 글자 ‘봉미라’… 미라마다 사연

김한겸 교수가 보관 중인 미라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다. 얼굴색이 유난히 검어서 ‘흑미라’라는 애칭을 얻었다. 2004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견됐다. 흑미라는 타살로 추정된다. 컴퓨터단층촬영(CT)에서 좌측 흉부에 0.8㎝ 금속 파편 두 개가 발견됐다. 화살촉인지 다른 금속인지 아직 밝히지 못했다. 금속 때문에 폐에 기흉이 생겨 숨졌을 것이다.

2003년 경기도 안산시에서 발견된 ‘봉미라’는 버선에 ‘봉’자가 씌여 있었다. 연구비 부족으로 손을 대지도 못했다. 2010년 경기도 오산시에서 백골 남자 시신과 여자 미라 2구가 나왔다. 남편과 두 명의 부인이다. 여자 미라에 표기된 남편 관직이 7품, 10품이다. 첫째 부인(30대 초반 추정)이 사망하고 둘째 부인(10대 후반)을 얻었는데 그사이에 남편이 승진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미라는 출산 중 사망한 ‘파평윤씨 미라’다. 2002년 경기도 파주시에서 발견됐다. 옆구리에 혹이 있어서 암 덩어리로 알았는데 영상 촬영을 해 보니 태아였다. 사망 원인은 자궁 파열이다. 5분만 참았으면 출산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세계 유일의 출산 중 사망한 미라다.

김 교수의 미라는 모두 조선 초기·중기에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겨울에 사망하고 석회로 관을 제대로 밀봉한 게 미라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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